'기후재난 공포' 깨우친 관광업은 살고 둔감한 농업은 쇠락했다

입력
2023.01.2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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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소멸국을 가다② 피지
기후재난 등으로 위기 맞은 사탕수수
농부들 이탈하며 산업 쇠락 계속돼
'환경악당' 관광업계, 생존 위해 탈바꿈
정부도 합세…팬데믹 후 빠른 회복 중

편집자주

기후전쟁의 최전선에 태평양 섬나라들이 있습니다. 해발 고도가 1~3m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들은 지구 온난화로 생존을 위협받습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변 침식과 해수 범람이 삶의 터전을 빼앗은 지 오래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14개국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 세계 배출량의 1%가 안 됩니다. 책임 없는 이들이 가장 먼저,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부정의이자 불공정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에 당신의 책임은 없을까요? 한국일보는 키리바시와 피지를 찾아 기후재난의 실상을 확인하고 우리의 역할을 고민해 봤습니다.

관광업과 사탕수수 농업은 피지 경제의 양대 축이다. 관광업은 피지 국내총생산(GDP)의 약 40%를 차지하는 제1 산업이다. 사탕수수는 피지의 식민 역사와 얽혀 있다. 1874~1970년 영국 식민지일 때 인도 노동자들이 키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단일 작물 중 생산량이 가장 많다.

기후변화는 관광업계와 사탕수수 농업을 모두 위협한다. '킹 타이드'(밀물과 썰물의 파고 차가 연중 가장 높아지는 현상)로 인한 해변 침식은 리조트의 지반을 약화시키고, 사이클론(강한 회오리바람을 동반하는 열대성 돌풍)은 사탕수수밭을 강타한다.

두 업계의 대응은 갈렸다. 사탕수수 농업계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쇠락 중이다. 관광업계는 생존을 위해 갖가지 전략을 구사해 피지 환경 보호의 일등 공신으로 거듭났다.

'퍼펙트 스톰' 사탕수수 농업

피지 사탕수수의 호시절은 끝났다. 1972년부터 비티레부 섬에서 사탕수수 농사를 짓고 있는 머니람(69)은 "크기가 예전 사탕수수의 4분의 3쯤으로 쪼그라들었고 당도도 떨어졌다"며 "기후변화 탓인 것 같다"고 했다. 그것 말고는 사탕수수의 품질을 떨어뜨릴 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머니람은 어쩔 수 없이 비료에 매달리고 있다. "비료 종류를 다르게 해서 더 많이 써 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21년 설탕업계 국제저널인 '슈거테크'에 등재된 "피지의 사탕 산업:지속가능성 과제와 미래" 등 관련 논문을 종합하면, 머니람의 추정은 맞았다. 사탕수수 재배에는 1,200∼2,000㎜ 정도의 연간 강우량과 농지의 적절한 습도가 필수다. 2000년대 이후 기상환경이 급격히 바뀌어 가뭄, 사이클론, 홍수 등이 번갈아 닥치면서 사탕수수의 성장을 방해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결론이다.

피지 정부 지원은 비료 보조금, 농지 도로 접근성 확대 등에 집중돼 있다. 사탕수수 농장의 기후재난 대응 예산은 전혀 없다. 머니람도 2021년 '개인 농사 지원금' 명목의 보조금을 소액 받은 게 전부였다. 지난해엔 그마저도 받지 못했지만, 이유도 모른다.

농부들은 부업으로 눈을 돌렸다. 머니람도 동네에서 가게 3곳을 운영한다. 지금은 가게에서 얻는 수입이 6,000평(약 2,000㎡) 크기 사탕수수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보다 많다. 머니람의 딸 레카는 "농부들이 다들 우리처럼 장사를 하거나 택시 운전을 한다"며 "그만두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사탕수수 농업을 하는 농부는 2001년 1만8,000여 명에서 2018년 1만2,000여 명으로 33%가 줄었다. 머니람에게 사탕수수 농업은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져 온 가업을 계속한다"는 의미일 뿐,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은 아니다.


'기후악당' 과거 청산…환경보호 앞장서는 관광업계

"자연과 환경을 사랑하는 우리 고향에 온 걸 환영합니다." 피지 유일의 항공사 '피지에어웨이'의 피지행 여객기 안전수칙 안내 영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맹그로브 숲 조성 현장,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리조트, 거북이 보호 구역도 영상에 차례로 등장한다. 친환경 관광 마케팅이다.

실제 피지 관광업계를 지배하는 건 친환경이다. 환경을 지켜내야 관광업이 지속가능하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민간 관광업계가 환경보호와 재건에 앞장서고 있다. 비티레부 섬 서쪽 20여 개 작은 섬이 모인 '마마누다 제도'의 민간 리조트 14곳은 2001년 환경운동 단체 '마마누다 환경사회(MEC)'를 설립했다. 이후 유엔개발계획(UNDP) 등의 지원을 받아 산호 심기, 거북이 살리기 같은 해양 생물 보호 활동과 기후변화 관련 교육을 해왔다. MEC 일원인 티부아 섬의 캡틴 쿡 크루즈사 관계자는 "관광객들이 놀러와서 해변을 즐기고만 가는 게 아니라 왜 산호 같은 해양자원이 중요한지 조금이라도 알고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과거 피지 관광업계는 '기후 악당'이었다. 리 하워드 피지 관광청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리조트와 호텔에서 오수를 정화하지 않고 방류해 바다가 오염되거나 무분별한 스노클링과 스쿠버다이빙으로 산호가 파괴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말했다. 리조트 건설을 위한 토지 개발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홍수가 발생하기도 했다.

악당이 반성한 건 스스로 '기후변화의 피해자'가 되면서다. 예를 들어 비티레부 섬 서쪽 마나 섬의 '마나 섬 리조트'는 2016년 사상 최악의 사이클론 '윈스턴'으로 건물이 초토화됐다. 해변이 침식돼 리조트 바로 앞까지 물이 차면서 영업이 불가능했다. 하워드 COO는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후 지키기 행동에 나서는 것"이라고 했다. 다급한 생존형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인 셈이다.

피지 정부는 2021년 '지속가능한 관광 개발 프레임워크'를 만들어 "환경과 사회, 문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장 덜 미치는 방식의 관광업 개발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관광업이 국가 제1 산업인 만큼 사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해안·해양 관광 자원 보존이 정부의 우선순위다.

친환경에 눈을 뜬 덕분에 피지의 관광은 살아나고 있다. '코로나 쇼크' 탓에 관광업이 휘청이면서 2020년 피지 GDP의 약 16% 추락했지만, 2021년 말 국경을 연 뒤엔 국가 경제가 빠르게 회복 중이다. 피지 관광청에 따르면 2022년 관광 수입은 2019년의 80~85%를 복구했다.

나디(피지)= 장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