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되새기는 좋은 책들

입력
2023.01.25 21:00
25면
임경희 지음, '그림책으로 배우는 삶과 죽음'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이별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같이 밥을 먹고 웃고 떠들었던 사람이 순식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동안 상실을 경험한 누군가를 위로했던 것도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배움은 많았지만, 막상 삶의 종착지인 죽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죽음을 위로하는 법도, 애도하는 법도 말이다.

30년 넘는 교직생활을 하며 제자를 떠나보내기도 했고, 제자가 가족을 떠나보내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교사가 '그림책으로 배우는 삶과 죽음'(임경희 지음)이라는 책을 냈다. 저자는 학교에서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과 다양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을 통해 깨달은 점은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더는 꺼리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삶을 돌아볼 수 있으며, 죽음을 정의내리다 보면,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지 동시에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책에서는 그림책이라는 친절한 매체를 통해 죽음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죽음에 대한 삶의 태도에 대해 살핀다. 또한 남겨진 사람들이 상실감을 안고 어떻게 삶을 지속하는지 보고, 마지막 장에서는 사회적인 죽음에 대해 함께 애도하는 법도 살펴본다.

저자는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알아가는 길이 우리를 단단하게,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길임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을 서문에 붙였다. 나 역시 연말에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순간순간 먹먹해지는 마음을 달래는 중이다. 여러 그림책을 통해 다양한 죽음의 방식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살피다 보면, 어느새 먹먹해진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고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새로운 사랑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할아버지는 바람 속에 있단다'(록산느 마리 갈리에즈 글, 에뤽 퓌바레 그림)라는 그림책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손주에게 남긴 이야기다. 몸은 죽고 없지만 언제나 바람 속에서 소년과 함께할 거라는 메시지와 손주가 슬퍼하느라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까 봐 계절을 준비해 두었다는 할아버지의 편지는 남은 사람들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길 바라는지 당부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때로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른으로서 판단이 안 설 때가 있다. 그때는 '사랑하는 할머니'(딕 부르너 글, 그림)를 보면 좋다. 그림책에서는 미피네 할머니의 죽음 앞에 가족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관을 들고 숲으로 가고, 아빠 토끼가 편지를 읽는 장례식 풍경이 정갈하게 묘사되어 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문장은 미피 눈에 비친 '가족의 죽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아이의 충격을 덜어주려고 죽음을 미화하기보다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방법이 아이의 회복을 돕는 가장 빠른 길일 수 있다는 것을 책은 보여준다. 물론 죽음은 저마다 회복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섣불리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죽음에 대해 배우고 이야기하는 시간은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시간임을 확신한다. 우리 책방의 서가 한 칸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코너가 있다. 죽음에 대한 여러 에세이와 소설, 그림책들로 채워져 있다. 누군가에겐 왠지 피하고 싶고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코너일 수도 있으나, 그럴수록 나는 더 들여다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책을 보다 보면 오히려 슬펐고 상처 입었던 마음이 회복되는 걸 느낀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저 멀리에 두고 피할 게 아니라 매일 생각하면서 지금의 삶을 돌아보는 것일 수 있기에. 그래서 '그림책으로 배우는 삶과 죽음'을 누군가는 '사랑의 책'이라고 부른다. 죽음에 대해 배우는 일은 삶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