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 내 말이 법이야"... 처벌도 수사도 어려운 가스라이팅 범죄

입력
2023.01.1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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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관계 형성한 후 '심리적 지배'
이후 학대나 신체·재산 갈취로 이어져
양형 이유 기재 2년도 안돼...판결문 20개 뿐
"별도 범죄 규정 어렵더라도 양형 인자에 감안 필요"
해외에선 물리적 폭력 없는 지배 행위도 처벌

“너 때문에 내가 아프잖아.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다 널 위한 거야.”

“말 안 들으면 다 폭로할 거야. 내 말이 법이야.”

전문가들이 꼽은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 범죄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관계를 강조하다가 협박하고, 다시 미래에 대한 기대 심리를 자극하는 식이다. 가스라이팅 범죄는 피해자의 정신을 옭아매는 것이 핵심이다. 성격이 다른 협박과 회유를 오가며 정신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면 손쉽게 범죄 먹잇감이 된다. 3년간 성매매에 시달리다 최근 직장선배 부부의 마수에서 벗어난 30대 여성 A씨도 이런 과정을 거쳐 노예 같은 삶을 살았다.

이처럼 가스라이팅 범죄는 장기간 개인의 인격을 철저히 말살한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크지만, 제도적 보호막은 미비한 실정이다. 현행법과 제도에는 가스라이팅과 심리 지배 등의 범죄 수법에 대한 정의조차 없다. 당연히 이와 관련한 별도 수사지침이나 피해자 조사 시 유의사항 등도 마련돼 있지 않다.

가스라이팅과 관련한 수사 및 대응조치 등 제도 보완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은밀성’과 ‘확장성’이 큰 범죄 특성 탓이다. 가해자는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몰래 상황을 조작하고 피해자를 세뇌시키는 데 익숙하다. 일단 주종관계가 확실히 정립될 경우 이후 피해자는 각종 범죄의 도구로 활용된다. A씨도 성매매로 5억 원을 갈취당하는 동안 주변에 도움을 청하거나 저항할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심지어 세뇌 정도가 심하면 범죄가 드러나도 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을 원치 않은 사례도 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18일 “가스라이팅 범죄자는 상대의 심리를 조작하는 데 능하기 때문에 피해자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범죄를 인식하지 못하게끔 조종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당장 정서적 학대를 별도 범죄로 규정하기 어렵더라도, 수사 가이드라인과 재판부 양형 인자에 심리 지배 등 가스라이팅 범죄 특징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원은 “일반 성인도 위계 위력에 의해 얼마든지 항거불능 상태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며 “데이트, 가정폭력, 노동착취 문제에도 가스라이팅이 내재돼 있을 때가 많아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도 “가스라이팅 기반 폭력범죄는 가ㆍ피해자 분리와 같은 임시 조치가 즉시 이뤄져야 하고, 심리적 지배가 종료된 뒤 피해자에게 처벌 의사를 물어보는 등 전용 가이드라인 마련도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해외에선 물리적 폭력 없는 지배 행위(강압적 통제)도 처벌하는 법적 기반을 구비하는 추세다. 미국에선 최근 가스라이팅 여파로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게 된 사건에 대해 형사책임을 묻는 판례도 등장했다.

우리 사법기관은 2021년 6월부터 가스라이팅 기반 범죄를 양형 이유에는 기재하고 있다. 의정부지법은 당시 판결에서 “심리적 장해 수단(일종의 ‘가스라이팅’)으로 피해자에게 한정된 구역에서만 행동의 자유가 인정된 경우도 감금에 해당된다”며 피고인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가스라이팅 수법이 적힌 판결은 2021년 9건, 2022년 11건에 그치는 등 아직 자리잡지 못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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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진 기자
박은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