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는 30대 전업주부입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이가 삶의 전부였는데 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몰입도가 줄었어요. 아이가 등교하면 주로 집에서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저를 남편이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입니다.
남편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남편이 저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게 느껴져요. 남편 말로는 제가 전업주부이면서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알바를 하거나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 종일 시간만 죽이고 있다고 합니다. 남편은 제가 아침에 아이를 등교시키고 다시 자는 것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이 본인에게는 못 견디게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누워 있거나 핸드폰 게임을 하는 저를 볼 때마다 그런 얘기를 해요.
사실 스스로 생각해도 제 자신이 작아 보입니다. 아이에게 손이 많이 필요했을 때는 육아에 최선을 다하는 하루하루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예전처럼 저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제가 이 사회에 쓸모없는 구성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 취업준비를 하면서 안절부절했던 10년 전 제가 떠오릅니다. 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기분입니다. 대학 졸업 후 빨리 취업을 하고 싶어 휴학도 한번 하지 않았는데 정작 취업이 되지 않았어요. 졸업유예까지 하고 취업준비에 매진했는데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어요. 취업준비를 할 당시에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수가 없어 부모님께 손을 벌렸고, 취업을 못 했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어요.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었지만 그때는 한마디 말대꾸도 하지 못한 채 듣고만 있었어요.
그때의 서운함이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어요. 저는 4남매 중 둘째예요. 언니가 있었지만 엄마의 부탁으로 초등학생 시절부터 동생들을 도맡아 돌보곤 했어요. 엄마는 저에게 늘 "네가 가장 믿음직하다"는 표현을 자주 했습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학창시절 내내 학원 한번 보내달라고 한 적이 없었죠. 대신 "언니나 동생이 학원을 보내달라고 해서 걱정이다"라는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 저에게 취업을 못 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쏟아냈던 부모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어느 날 부모님을 찾아가 당시에 왜 그렇게까지 비난했는지, 왜 다른 형제들만 학원을 보내주고 나를 방치했는지를 울면서 따진 적도 있어요. 제 얘기를 다 들은 엄마는 사과를 하셨지만 그 뒤로는 오히려 제가 부모님을 보기가 민망해서 왕래를 하지 않고 있어요.
우여곡절 끝에 원하지 않았던 회사에 취업을 했어요. 3년쯤 일을 했는데 결혼과 동시에 퇴사했습니다. 당시에는 회사가 지옥처럼 느껴졌고, 남편도 결혼 후 아이를 키울 때는 아내가 집에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기다렸다는 듯 사표를 냈어요. 남편 말처럼 지금이라도 공부를 시작하거나 짧게라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이상하리만치 의욕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10년 전 일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밤에 잠을 거의 자지 못합니다. 낮에는 하루 종일 기운이 없고 몸이 처져요. 피곤하다며 누워 있거나 핸드폰을 멍하니 보고 있는 상황이 반복되니 남편과도 자주 싸우게 됩니다.
어느 날은 '뛰어내려서 죽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서 병원을 찾은 적도 있습니다. 약을 먹었는데 부작용이 너무 심했고, 그 기억 때문인지 병원가는 게 내키지 않아 더 이상 가지 않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우울증 증상을 털어놓았는데 본인이 더 힘들다는 반응이었어요. 그 후로 우울증 이야기는커녕 일상에서도 남편의 눈치를 더 보게 됐어요. 남편이 있으면 집에서 편하게 누워 있기가 어려울 정도로 불편합니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아이가 자라서 저를 한심하게 생각할까봐 걱정되고 불안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슬기(가명·38·주부)
슬기씨, 남편의 직설적인 표현에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까요. 슬기씨는 가까운 사람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말에 더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남편은 슬기씨가 겪는 우울증 증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슬기씨가 겪고 있는 자살 충동은 시급하게 치료가 필요한 증상이에요. 상담에 앞서 지금 상태를 남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되도록 빨리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실 것을 당부합니다.
우울증과는 별개로 슬기씨가 남편과의 관계에서, 혹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건강한 내면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봅시다. 슬기씨는 상당히 완벽주의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써왔고, 그 과정에서 삶의 기준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향하게 된 것 같아요. 이런 분들은 과정보다는 보여지는 결과물이 중요하고, 그 결과에 따라 자기 자신을 평가합니다.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는 슬기씨 입장에서 결과를 떠나 과정과 노력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10년 전 취업준비를 하던 때도 그렇습니다. 원하는 회사에 취업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대학 생활 전체가 실패한 건 아니죠. 아르바이트로 스스로 용돈을 벌어 쓸 만큼 매 순간 열심히 살았고, 취업이라는 목표를 향해 휴학 한번 하지 않고 성실히 달려왔어요. 결과가 좋지 못하다고 그 과정 전체가 무의미해지는 건 결코 아니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슬기씨는 취업 실패라는 사실 하나로 자신이 더 열심히 살지 못한, 무능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스스로 내린 것 같아요. 그것도 자기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부모님의 비난 한마디로부터 자존감이 크게 훼손된 상태로 말이지요.
부모님에게 슬기씨는 다른 자녀들에 비해 편안하고 쉬운 자녀였을 겁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자신의 욕구를 내세우지도 않고 늘 가정 형편과 부모님의 상황을 배려해서 행동했으니까요. 타인의 감정이나 평가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슬기씨의 기질도 그런 환경을 더욱 강화시켰을 겁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피고, 그들의 생각과 가치를 내면화하는 과정이 오랜시간 이어져왔기 때문에 지금도 자기가 기준점으로 삼는 감정, 생각이 뚜렷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하든, 누구와 관계를 맺든 나의 본래 모습과 타인의 기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무게 중심이 타인에게 치우칠 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을 해도 진정한 만족을 느끼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과정에서 느끼는 소소한 만족감보다 보여지는 결과에 몰입할 수밖에 없죠. 자신의 성향과 기질을 고려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꾸준하게 해가다 보면 비록 실패를 할지언정 크고 작은 성취감을 쌓아갈 수 있습니다. 그 반대 경우는 뭘 해도 만족감이 떨어지고 타인의 평가에 불안하고 초초해할 수밖에 없죠. 10년 전 취업준비를 하던 20대 청년기와 마찬가지로 내 자신의 욕구, 남편의 기대 사이에 갭이 벌어지면서 점차 불안해지고, 아예 의지를 놓아버리는 무력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 같아요.
슬기씨는 지금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고민할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당장 뭔가를 시작하고,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사람이 되어야만 삶의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금까지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 남들의 평가로 받은 상처를 솔직한 내면의 기준으로 보듬고 치유하는 게 먼저예요. 가족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남편의 기대에 어떻게 부응할지 생각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스스로 어떤 것을 원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지 못하면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목표를 제대로 세울 수 없고 무엇을 하든 만족감을 느끼기 어려울 거예요.
슬기씨, 원하는 회사에 취업하지 못한 10년 전이나, 잠시 삶에서 방향키를 잃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지금도 슬기씨의 인생에서 결코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당신은 주변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배려하는 사려 깊은 사람입니다. 그 섬세함으로 이제는 자신 안의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데 더 집중해보세요. 지금의 심리적 어려움이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삶에 집중하게 되는 변화의 계기가 되길 바라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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