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앞에 선 아프가니스탄 여성 킥복서. 양손에 복싱 글러브를 끼고 어깨엔 챔피언 벨트까지 걸쳤는데 정작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이슬람 전통 복식 ‘부르카’를 입었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발목까지 천을 두르고 망사로 두 눈까지 가리는 부르카는 탈레반이 집권한 아프간에 여성 인권에 대한 탄압을 상징한다. 킥복서는 여성의 체육 활동마저 금지한 탈레반에 항의하는 의미로 부르카를 입고 포즈를 취했다.
AP 통신은 지난 11일 킥복싱을 비롯해 축구, 배구, 스케이트보드, 사이클, 크리켓 등 다양한 분야의 스포츠를 즐겨 온 아프간 여성들의 사진을 공개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운동 용품을 들고 포즈를 취하거나 직접 훈련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다양한 사진들 속에서 등장하는 이들 여성의 공통점은 모두 경기복 대신 운동하기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부르카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부터 11월 사이 아프간의 수도 카불 또는 다른 어딘가에서 비밀리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들에는 스포츠에 대한 여성들의 열정과 그동안 쌓아 온 노력의 흔적이 묻어난다. 11명의 여성 축구 선수들은 유니폼 위에 부르카를 입고 축구공을 손에 들었는데, 하나같이 까맣게 때가 묻었다. 역시 부르카를 입은 채 바닥에 앉은 스케이트보더는 보드 패널이 닳아 나무 결이 그대로 드러난 낡은 스케이트보드를 비스듬히 세우고 포즈를 취했다. 사이클에 올라타거나 크리켓 배트를 들고 타격 자세를 잡은 여성, 양다리를 벌리고 스트레칭을 하는 태권도 선수와 우슈를 익혀온 여성들 모두 어울리지 않는 부르카를 입고 공개적인 체육 활동 허용을 촉구했다.
아프간에서는 2021년 8월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고 탈레반이 집권한 이후 여성에 대한 규제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여성의 대학교육을 금지한 것은 물론 자국 내에서 공개적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것 또한 강력히 금지하고 있다. 스포츠 경기 중 여성의 얼굴과 몸이 노출될 수 있어 이슬람 율법에 반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탈레반의 비상식적인 인권 탄압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판이 꾸준히 일고 있지만 현실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얼굴 없는' 아프간 여성들의 사진에는 부르카 대신 경기복을 입고 관중의 함성소리가 울려 퍼지는 운동장에서 마음껏 기량을 펼치고 싶은 체육인의 소망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