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이 사라졌다] 이인혜 연구사 인터뷰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혹은 외부인의 시선에서 보면, 한국 목욕탕 문화는 참 기이하기도 하다. 폭염에도 회사 갈 땐 긴바지를 챙겨입고 노출 심한 옷에 여전히 실눈 뜨고 보는 '유교 문화'가 건재하지만, 목욕탕만 가면 낯선 사람 앞에서 훌러덩 옷을 벗는다. 처음 만난 이의 등을 스스럼없이 밀고, 세신사에게 내 벗은 몸을 얌전히 내주는 이토록 독특한 목욕탕 문화는 어떻게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게 됐을까.
이인혜 한국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목욕탕 연구를 시작한 것도 이런 의문에서였다. 한국민속박물관의 목욕탕 연구를 주도한 이 연구사는 2019년 11월에 '목욕탕-목욕에 대한 한국의 생활문화'라는 321쪽짜리 장문의 보고서를 냈다. 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국민속박물관에서 만난 이 연구사는 한국 목욕탕 문화의 기원과 변천 과정을 한국일보에 설명했다.
이 연구사에 따르면 인간이 공동목욕탕을 이용한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수로를 갖춰 다량의 물을 공급할 수 있던 고대 로마에서 목욕은 생활의 일부였다.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로마 일대에 총 856곳에 공공욕장이 존재했고, 일반 시민도 하루 한 번씩 목욕을 했다. 한국 역사에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온천욕 등 목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다만 돈을 내고 들어가 낯선 이들과 함께 나체로 씻는 '대중목욕탕'이 생긴 것은 1900년대 전후, 대한제국 시절이다. 갑신정변, 갑오개혁 이후 개화파들은 '국민 위생관리'를 위해 공중목욕탕을 제안했고, 일본인 또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목욕탕을 만들었다. 목욕탕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1897년 독립신문. '북청사람 강학기씨가 탕 안에서 오줌을 눠 일본인 주인이 영사관에 인도하려 했다'는 짤막한 사건 기사에서다. 1900년 이후엔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에 목욕탕 광고가 등장한다. 1906년 만세보(천도교 신문)에 따르면 서울 사대문 안에는 조선사람이 운영하는 목욕탕 두세 개가 있었다고 한다.
목욕탕이 생겨나고 확산된 이유는 결국 위생이었다.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사람들이 도시로 몰렸지만, 집집마다 상하수도는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 때는 조선에 콜레라가 창궐한(1886년)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일본과 가까웠던 개화파 지식인이나 사회지도층에게 위생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계몽운동가였던 윤치호(1865~1945)는 "대중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독립을 운운할 수 있는 건가"(윤치호일기)라며 자조적 비판을 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목욕탕은 본격적으로 전파됐다. 에도시대(1603~1868)부터 목욕을 즐겼던 일본인들은 한국에 와서도 군대나 경찰관서 등에 목욕탕을 설치했다. 이 연구사는 "목욕탕은 시민의 질병과 건강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됐다"며 "오염된 개울물로는 씻어도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깨끗한 물을 주기적으로 공급해 줄 특정한 장소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어떤 공간에 들어가서 벗고 씻는 목욕탕은 결국 근대화의 산물"이라고 결론냈다.
6·25 전쟁 이후에도 위생상 이유로 목욕탕 설립이 장려됐다. 1970년 이후에는 목욕탕 건립과 이용이 새마을운동의 대상이 됐다. 읍내 장터 근처에는 장날을 전후해 이용할 수 있는 목욕탕이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장이 서지 않는 농촌 마을에는 정부가 나서 '새마을 목욕탕'을 보급했다.
가족끼리 매주 목욕탕을 찾는 '1주 1목욕'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다. 목욕탕 숫자가 늘고 가격도 저렴해지면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사람이 몰리면서 목욕탕에는 위생 이상의 기능이 추가됐다. 증기 찜질을 할 수 있는 사우나가 설치됐고 때밀이 수건(이태리 타월)과 함께 세신사가 등장했다. 이발소도 목욕탕 안으로 들어왔다. 차별화의 방편으로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는 리클라이너 의자를 갖추거나 운동기구를 완비한 목욕탕도 등장했다. 대형 찜질방 안엔 식당, 탁구장, 만화방이 들어서기도 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커뮤니티 기능이다. 시골에서 동생이 농사지은 콩 따위 작물을 동네목욕탕 입구에 두고 판다거나, 사골뼈 등을 공동 구매해 세신사 아줌마에게 맡겨놓기도 했다. 서로를 별명으로 친근하게 부르는 유대 관계도 목욕탕만의 문화다.
△목욕 △휴게 △공동체 기능을 한꺼번에 탑재한 목욕탕은 1990년대 이후로도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 속에서도 인기가 꺾이지 않았다.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인허가데이터에 따르면 전국에 목욕탕 숫자가 정점을 찍은 해는 2003년(9,919곳)이다. 이 연구사는 "대다수의 집에 샤워실이 들어오고 간편하게 몸을 자주 씻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는데도, 목욕탕이 성행한 것은 일종의 관성이 작용한 것"이라며 "사회적 관계 등 추가된 여러 기능들이 목욕탕 문화를 유지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화변동의 에너지는 관성보다 힘이 셌다. 차츰 목욕탕에 가본 적 없는 세대가 생겨났고, 목욕탕을 즐기던 고령 세대는 더 이상 목욕탕을 찾지 못했다. 결정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팬데믹 기간 비대면 문화는 목욕탕이 쇠퇴에 큰 영향을 줬다. 위생 때문에 생겨난 목욕탕이 또다른 위생 때문에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된 아이러니다. 이 연구사는 "섞이는 것을 꺼려하는 트렌드가 생겨났는데, 이미 씻을 장소(욕실)가 집에 있었다"며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사람들은 목욕탕을 찾지 않게 됐다"고 설명했다.
동네목욕탕의 결말은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있다. 이 연구사는 샤워 위주로 목욕문화가 변한 상황에서 운동이나 찜질 등 부가적 기능이 추가되지 않은 동네목욕탕은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목욕탕 카페처럼 이색 경험을 주는, 레트로(복고풍) 명소로 변화할 경우 유명세를 탈지도 모르지만 그 관심이 오래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우리 기억 속의 동네목욕탕은 더 이상 존립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누구나 집에 샤워 시설을 완비하고 살지는 못하기에, 대중목욕탕의 멸종은 또다시 공중보건상의 문제점들을 유발할 수 있다. 노숙자나 독거노인 등이 제대로 몸을 씻을 곳은 사실상 동네목욕탕밖에 없다. 이 연구사는 "동네목욕탕과 취약계층의 상생을 위해, 목욕 바우처 지원을 확대하는 복지도 고민해 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목욕탕이 사라졌다' 몰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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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청계천 배달하며 품었던 목욕탕의 꿈, 이제 놓아주려 합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11116070002790
②목욕업 최전성기는 2003년... 통계로 본 대중탕 흥망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11115240002597
③망해도 폐업 못하는 목욕탕의 속사정… "철거비만 수천만원"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11611240004703
④때 밀어 떼돈 벌던 시절이 있었다... 영광의 세월 지나온 세신사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11611170002245
⑤공중위생 덕에 흥한 목욕탕 '팬데믹 위생' 탓에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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