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능 날에 ‘치한 방지’ 캠페인 벌이는 까닭

입력
2023.01.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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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날은 성추행당해도 신고 못 할 것"
'치한 데이' '치한 축제' 등 악성 게시물 증가
시민들이 앞장서 퇴치 운동 벌여

한국 주재 일본 언론사 기자들은 매년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당일마다 ‘경찰차를 타고 시험장에 가는 수험생’을 취재한다. 수험생이 시험장에 지각하지 않도록 경찰이 직접 지원한다는 사실을 독특하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능 풍경을 전하는 기사에는 ‘듣기평가 시간엔 비행기도 공항 이착륙을 삼간다’는 내용도 곁들인다.

하지만 일본의 수능시험이라 할 수 있는 ‘대학입학공통테스트’ 때도 다소 독특한 모습이 목격된다. 경찰이 수험생을 대상으로 '성추행 예방'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올해 시험일(14, 15일)을 이틀 앞둔 12일 도쿄 메구로구의 지유가오카역 앞에선 ‘일일 서장’에 취임한 연예인이 전단지를 나눠 주며 ‘치한 방지’를 호소했다. 해당 전단에는 전철 내 성추행 피해를 당했을 경우 대처 방법과 이를 목격한 시민들이 할 수 있는 행동 등이 적혀 있다.

경찰이 대입 시험을 앞두고 치한 방지 캠페인에 나선 이유는 수년 전부터 시험 때마다 인터넷상에 올라오는 악성 게시물 때문이다.

트위터 등을 통해 확산된 문제의 게시물은 대입 시험일을 ‘치한 무제한’ ‘치한 축젯날’ 등으로 지칭하며 수험생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을 부추긴다. 시험 당일엔 수험생이 성추행을 당해도 지각하기 싫어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것이므로 성추행을 해도 잡히지 않는다는 논리다. 올해도 어김없이 ‘치한 찬스 데이’라며 치한 행위를 부추기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비열한 게시물에 경찰보다 먼저 시민이 분노했다. 이들은 2020년 트위터상에서 ‘#withyellow’라는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했다. 성추행은 범죄이고 수험생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고, 시험 당일 오전 노란색 옷을 입거나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전철에 탑승해 주위를 감시하는 등 수험생을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서기도 한다. 올해도 여러 시민들이 시험 당일인 14일 아침 노란색 모자와 목도리 등을 착용하고 치한 방지 운동에 동참했다.


시민들은 철도회사에도 예방 대책을 요구해 왔다. 올해는 시험 당일 직원이 전철 내를 순회하거나 관련된 안내 방송을 하는 등 다수 회사가 캠페인에 동참했다. 도쿄도 교통국은 시험을 사흘 앞둔 지난 11일부터 전철 내 성추행 대책 포스터를 도에이 지하철 노선의 역 구내와 차내에 게시했다. 도쿄도립대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제작한 이 포스터는 시민에게 ‘도와줄 준비가 돼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성추행 현장을 목격한 시민이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지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수험생이 대입 시험 당일 성추행을 당해 시험에 지각하면 어떻게 될까. ‘시험장으로 가는 도중의 사고 또는 부득이한 사유’에 해당하므로 경찰에 신고하고 받은 증명서 등을 제출하면 추가 시험을 볼 수 있다.

도쿄= 최진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