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어진 용 허리에 반짝반짝 달과 별… 소수민족 다랑논 마을

입력
2023.01.14 10:00
<108> 계림산수 ①다랑논 마을 핑안촌과 구이린


편집자주

중국 광시좡족자치구 구이린은 아름다운 자연을 상징하는 계림산수로 유명하다. 카르스트 지형이 수놓은 풍광에 심취하고 소수민족이 선보이는 인문에 공감한다. 오지 다랑논 마을에 오르고 강을 유람한다. 산봉우리와 강변 마을에서 풍광에 젖는다. 봉우리를 바라보며 대나무 뗏목을 타고 공연도 관람한다. 카르스트 지형을 간직한 상인 마을도 찾는다. 모두 5편으로 나눠 발품 기행을 떠난다.


인천에서 직항을 타면 구이린(桂林)까지 4시간 걸린다.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북부에 위치한다. 꽤 많은 사람이 찾는 인기 여행지다. 카르스트 봉우리가 멋지기 때문일까, 상상하는 매력이 풍성하다. 대한민국에선 결코 본 적 없는 풍광이다.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는 ‘계림 경치가 최고!’라는 감탄사다. 남송 시대부터 회자됐으니 800년이나 유행어다. 봉긋한 봉우리를 연상하는 유람만 생각하기 쉬운데 꼭 그렇지 않다. ‘용과 호랑이가 포효하고 별과 달이 반짝이는’ 다랑논 마을이 구이린에 있다.

북쪽 100㎞ 거리에 룽셩각족자치현(龍勝各族自治縣)이 있다. 각족이라니? 민족 이름이 아니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이 없어 ‘제각각’이란 뜻이다. 10여 개 이상의 여러 민족이 산다. 먀오족, 야오족, 둥족, 좡족, 한족 등이 주류다.

여기에 다랑논으로 유명한 산골 마을이 많다. 용척제전(龍脊梯田) 입구에 도착한다. 용척은 용의 등뼈를 말한다. ‘제’는 사다리, ‘제전’은 다랑논이다. 짐을 맡기고 가벼운 배낭만 메고 현지 관광버스에 오른다. 도랑 옆 평지를 따라 약 8㎞를 달린다.

다시 8㎞ 산길을 20여 분 동안 꼬불꼬불 오른다. 해발 약 500m를 급상승한다. 멀미가 나타날 정도로 가파르고 휘청거린다. 차창 밖 낭떠러지는 올라갈수록 깊어진다. 구사일생 느낌으로 땅에 내리면 핑안촌(平安村) 입구다. 좡족 마을이며 랴오씨(廖氏) 집성촌이다. 좡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민족이다. 2021년 통계연감 기준으로 거의 2,000만 명에 육박한다.

100m에 이르는 오르막길 양쪽에 공예품 가게와 식당이 이어진다. 국수나 볶음밥으로 가볍게 요기를 하고 언덕을 오른다. 2013년부터 매년 찾다시피 하는 단골 숙소가 있다. 30분가량 땀을 흘려야 하지만 아주 힘들지는 않다.

매년 다랑논 여행을 한다. 1년에 두 번 간 적도 있다. 갈 때마다 풍광을 제대로 보려고 날씨에 민감하다. 운무가 심해 하얀 도화지만 본 적도 있다. 다랑논 끄트머리만 겨우 눈에 넣기도 했다. 화창한 날씨라면 행운이다.

우연히 찾은 처음 숙소를 바꾸지 않았다. 능선 한복판에 있는 용원각(龍源閣)에 도착한다. 주인은 만날 때마다 친동생처럼 응석을 부린다. 도착하면 따뜻한 차를 따라준다. 2층이 잠자는 방이다. 나무바닥이 삐걱거리지만 확 트인 전망이라 처음 온 사람은 늘 환호성을 지른다. 짐을 풀고 다랑논을 보러 나선다.


산골인 데다 민가가 꼭 붙어 있어 골목길 찾기가 쉽지 않다. 짐 싣고 오르내리는 말이 많다. 여행객이 늘어나니 리모델링하느라 공사가 많다. 마부는 빨간 바가지를 들고 뒤따른다. 쏟아지는 배설물을 얼른 담아 길바닥에 남기지 않는다. 말이 나타나면 서둘러 옆으로 비킨다. 마부와 눈인사하면 언제나 순박하게 웃는다. 이정표를 따라가면 마실 나온 주민과 만난다. 손자 업고 나온 할머니도 밝은 인사를 건넨다. 인정이 두둑한 마을이다.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도 표정으로 그냥 이해된다.

휘어진 모습이 아홉 마리 용이요, 다섯 마리 호랑이



논 사이로 인파가 보이기 시작한다. 천천히 사잇길 따라 올라간다. 평범한 뒷동산이다. 가까이 가면 크고 작은 논이 능선 위에 펼쳐져 있다. 물길이 있어 물 고인 논도, 그렇지 않은 논도 있다. 어떤 날은 물이 없고 온통 물이 꽉 차기도 한다.

위에서부터 골고루 파고들고 남은 물은 아래로 흘러간다. 햇볕이 수면을 비추면 반짝거린다. 중턱에 나무 한 그루가 솟았는데 여기부터 갈림길이다. 영화에 등장하면 어울릴만한 풍광이다. 땀나고 호흡이 가쁘면 꼭대기에 도착한다.

구룡오호(九龍五虎)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몰라도 100점 만점이다. ‘용 아홉, 호랑이 다섯’이라니 도대체 어디가 용이고 어디가 호랑이인가? 늘씬하게 쭉쭉 뻗은 다랑논에 먼저 현혹돼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시야 한가득, 한 다발 담는다.

논 사이로 올라온 길이 용이다. 아홉 마리 용을 헤치고 올라왔다. 마을이 보이는 쪽에 있는 다랑논이 오호다. 호랑이 눈이 번쩍하는 듯한 논이 다섯이다. 이소룡 영화 ‘용쟁호투’가 생각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용과 호랑이가 싸우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농사 경쟁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봐도 용의 승리 같다.

물이 흥건하고 날씨가 좋으면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운무가 하늘을 조금 가려도 볼만하다. 다랑논까지 침범하지 않으면 괜찮다. 멀리 전경을 보면 첩첩산중이다.

14세기경 원나라 시대부터 개간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용이나 호랑이를 염두에 두진 않았다. 다랑논이 멋진 지방은 많은데 용 허리를 타고 오르는 경우는 드물다. 오를 때 보면 그저 수많은 논이 여기저기 있을 뿐이다. 꼭대기에 올라야 비로소 감흥이 북받친다. 24절기 모두 다른 풍광일 터, 농부의 일상을 따라 365일을 담고 싶다.

핑안촌의 푸짐한 인심, 구수한 대통밥



마을 뒤쪽을 지나는 샛길이 있다. 나무 실은 리어카가 이동할 정도 너비다. 민속 복장을 입은 아주머니들과 마주친다. 주민은 아닌 듯하다. 꼬불꼬불 길을 가면 계곡에서 흘러내린 우물이 몇 군데 있다. 산에 대나무가 많아 죽순 말리는 모습도 흔하다. 먹을 만큼 가져가도 좋다고 한다. 자연의 선물을 욕심 없이 나누려는 온정이다. 5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 뒷산 다랑논도 가지런하게 조성돼 있고 따가운 햇살 아래 노동하는 농부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평탄한 길이라 기분이 상쾌하다. 고개를 몇 번 돌면 또 다른 다랑논이 펼쳐진다. 칠성반월(七星伴月)이다. 북두칠성이 보름달과 짝을 이룬 모양새다. 어떤 모습을 보고 지었는지 궁금하다. 전망대에 서서 내려다보면 한가운데 물에 잠긴 동그란 ‘보름달’이 보인다. 별처럼 생기지는 않았어도 볼록한 다랑논이 일곱 개다. 달을 기준으로 왼쪽에 4개, 오른쪽에 3개다. 전체로 관망해야 제대로 보인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복잡하다. 꾸역꾸역 민가를 짓다 보니 골목이 여러 갈래다. 길 잃기 십상이다. 초등학교가 하나 있어 이정표를 삼으면 된다. 학교 옆에 좌판 깔고 할머니들이 채소를 판다. 여러 가지를 한 움큼씩 산다. 10여 명 먹을 만큼 샀는데도 2,000원이 넘지 않는다. 그냥 산에서 주운 셈이다.

대나무에 쌀을 넣고 불을 지핀다. 통이 굵어 아이들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다. 초저녁이라 죽통밥(竹筒飯) 만드느라 연기가 수북하게 피어난다. 온통 대나무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숙소에서 죽통에 넣을 재료를 주문한다. 쌀과 찹쌀이 기본 재료다. 현지인은 고기를 넣는데 느끼한 맛을 없애려면 무조건 뺀다. 버섯과 연근, 옥수수를 넣는다. 살짝 집어온 죽순을 넣으면 향긋하다. 주인은 언제나 묵묵히 듣고 그렇게 준비한다.

저녁은 마당에서 뛰어놀던 닭으로 샤부샤부를 준비한다. 손질한 닭에 버섯과 생강을 넣고 푹 삶는다. 닭고기 먼저 먹고 할머니에게 산 채소를 넣어 데쳐 먹는다. 죽통밥과 함께 먹으면 꿀맛이다. 밤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운다. 졸리면 2층으로 올라가 꿈나라로 가면 된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청정 구역 냄새가 난다. 운무가 서서히 걷히고 다랑논이 나타난다. 아침도 죽통밥으로 해결한다. 상큼한 대나무 향기가 난다. 달걀과 만두, 국수도 함께 먹는다.

작별 인사를 하면 주인은 언제나 아무 말없이 웃는다. ‘내년에 다시 보자’고 해도 그저 웃기만 한다. 가볍게 포옹을 한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시조전(始祖田)을 만난다. 다랑논을 처음 만든 조상의 손길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계림산수갑천하, 경치 하나는 계림이 갑!


버스를 타고 하산 후 짐을 찾아 구이린 시내로 이동한다. 남북으로 이강(灕江)이 흐르고 지류인 도화강(桃花江)이 구불구불하다. 두 강 사이에 크고 작은 4개의 호수가 있다. 남쪽부터 삼호(杉湖), 용호(榕湖), 계호(桂湖), 목룡호(木龍湖)다. 7.3㎞ 거리, 38만㎡ 수면을 정비한 양강사호(兩江四湖) 공정이 이뤄졌다. 계획 수립 5년 만인 2002년 완공했다. 도시가 깔끔해졌다.

삼호에 일월쌍탑(日月雙塔)이 있다. 41m 동탑(銅塔)인 일탑과 35m 유리탑(琉璃塔)인 월탑이다. 당나라 기단 위에 북송 시대 골격으로 2001년에 중건했다. 밤이 되면 동탑은 해처럼 붉게, 유리탑은 달처럼 은은하게 빛난다.


1㎞ 북쪽에 둥시향(東西巷)이 있다. 명나라 시대부터 번화가로 역사문화 거리다. ‘구이린의 청룡백호’라는 별명을 지닌 명당이다. 초록 빛깔로 만든 이정표 팻말이 산뜻하다. 잘 정비된 거리라 단정하다. 고급 식당과 갤러리, 공연장, 전통 옷과 공예품을 파는 거리로 유명하다. 구이린의 명동이라 할만하다. 평일 오후 한적한 거리를 거닐며 눈요기를 한다.


가게에 들어가 흥정도 하고 담장에 붙은 장식에도 눈길을 보낸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과일을 서비스로 준다. 하트 모양으로 오린 종이에 한글로 ‘계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 썼다.

민물 가재 샤오룽샤(小龍蝦)를 주요 재료로 하는 훠궈식당으로, 이름도 참 독특한 와이쭈이(歪嘴)다. ‘비뚤어진 입’이라니 맵고 맛있다는 메시지다. 배불리 먹고 맛도 최고다. 오타 한 자 없는 감동을 선물 받으니 금세 소화가 되는 듯하다.

이강을 따라가면 우뚝 솟은 봉우리가 등장한다. 63m 높이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복파산(伏波山)이다. 동한의 개국공신 마원 장군이 머물렀다. 베트남 북부의 교지(交趾) 왕국 정벌을 위해 거쳐간 곳이다. 그의 별호를 따서 지은 봉우리다.

‘청사고(清史稿·청나라 역사를 정리한 책)’에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제왕과 문신, 무관을 봉공했다. 수도 베이징에 있는 역대제왕묘 신위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릴 정도로 유명한 장군이다. 좁은 공간에서 검술 훈련을 하고 취식까지 했다니 누가 만든 전설인지 모르겠다.

500m 정도 더 올라가면 첩채산(疊彩山)이 나온다. 73m 높이의 깎아지른 봉우리 정상이 명월봉이다. 등산로를 따라 중첩해 올라야 하는지, 봉우리가 첩첩한 풍광인지 모를 작명이다. 카르스트 봉우리의 다양한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믿어보자. 등산첩채산(登上疊彩山), 활도일백삼(活到一百三) 비석이 있다. 매일 오르면 130세까지 산다는 이야기다. 장수하려면 구이린으로 가자!

땅바닥에서 번개처럼 솟았으니 시인의 손이 근질근질했다. 명나라 시인 이정은 ‘계림요군개기승(桂林繞郡皆奇勝), 위관등림차갱다(偉觀登臨此更多)’라 했다. ‘계림 이곳저곳 둘러보니 모두 기암 풍광이구나, 여기 오르니 웅장한 장관이 훨씬 많아라’라 했다. 담백한 감상이다. 이강이 흐르는 시내를 바라본다. 잔잔하고 푸른 물결이 계림산수인가? 순풍에 돛 단 느낌으로 멀리 봉우리를 조망한다.

불야성이라는 별명을 가진 목룡호가 첩채산을 둘러싸고 있다. 인공으로 연결한 뱃길이 있다. 밤에 찾아가니 송나라 시대 성벽이 형체만 보인다. 당시는 병영이었고 주민이 거주했다. 탑에 조명이 켜지고 수면에 알록달록하게 빛나고 있다. 칠흑 같은 밤이라 야경이 더욱 찬란하다.

배가 지나면 정자에 조명이 켜진다. 전통 복장을 입은 배우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배가 통과하면 공연이 끝나고 조명도 꺼진다. 배가 회전하면 반대편 누각에서 비파와 고쟁 연주가 시작된다. 밤배 지나는 시간은 겨우 2분이다. 배가 나타나면 연주가 시작되고 사라지면 연주도 끝난다. 배의 속도를 알고 있어 타이밍이 정확하다. 조명이 다시 꺼진다. 연인의 손을 꼭 잡고 싶은 구이린의 밤이 깊어간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