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살 테니 1억 돌려줘요"... '갑'이 된 세입자 '감액 갱신' 봇물

입력
2023.01.10 18:00
11면
지난해 4분기 갱신 계약 중 감액 비율 13%
2분기 대비 3배 증가... 2021년 이후 최고
금리 인상에 집주인 보증금 마련 못 해

#1.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사는 직장인 홍모(36)씨는 올해 2월 전세 계약 만기를 앞두고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1억5,000만 원 내려 재계약하자고 제안했다. 2년 전 임대차법으로 전셋값이 올라 고점인 6억 원에 계약했지만, 지금은 시세가 4억~4억5,000만 원까지 떨어진 것이다.

집주인은 대신 역월세를 제안했다. 6억 원에 갱신 계약을 하되 1억5,000만 원의 전세대출 이자를 집주인이 매달 내준다는 것이다. 홍씨는 "1억5,000만 원을 돌려받고 갱신 계약을 하거나, 2년 치 이자를 한 번에 받고 싶다"며 "둘 다 안 된다면 이사하겠다"고 통보했다. 다급해진 집주인이 홍씨 대신 저렴한 전세대출 상품을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2. 직장인 A씨는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5,000만 원 내린 8억5,000만 원에 갱신 계약을 제안했다. 현재 시세는 8억 원 이하로 떨어졌다. 처음엔 거절했던 집주인은 3,000만 원만 내릴 수 없냐며 흥정을 요구하고 있다.

집값이 떨어지면서 전월셋값을 깎는 '감액 갱신 계약'이 급증하고 있다. 집주인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빚어낸 현상이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사정하는 '을'이 된 셈이다.

10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트리지움 전용면적 84㎡는 지난달 15일 10억2,000만 원에 전세 계약이 이뤄졌다. 2년 전보다 2억3,000만 원 내린 갱신 계약이다. 마포구 아현동의 마포래미안푸르지오 전용면적 84㎡는 갱신요구권을 사용해 지난해 11월 종전 계약보다 1억 원 내린 9억 원에 재계약이 됐다.


감액 갱신 계약 증가세는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부동산 중개 스타트업 '집토스'가 국토교통부의 수도권 전월세 실거래가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4분기(10~12월) 갱신 계약 중 종전 계약보다 금액을 줄인 비율이 13.1%를 차지했다. 2분기(3.9%) 대비 3배 이상 급증한 수치로, 국토부가 관련 자료를 공개한 2021년 이후 최고치다. 종전 계약과 동일한 계약의 비율도 12.9%로 2분기 대비 4.2%포인트 늘었다.

금리가 치솟으면서 전세 수요가 줄고,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당장 전세금을 빼줄 수 없는 집주인들이 고육지책으로 종전 계약보다 싸게 재계약을 하는 것이다. 진태인 집토스 아파트중개팀장은 "전세퇴거대출(기존 세입자를 내보내기 위한 대출) 이자 역시 올라 금액을 깎더라도 기존 세입자와 재계약하는 게 집주인 입장에선 유리한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감액 갱신 계약의 원인인 역전세 현상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여경희 부동산R114 수석연구원은 "깡통전세 우려, 대출이자 부담 등으로 월세를 택하는 수요가 늘었다"며 "갭투자가 몰린 지역이나 입주물량이 많은 대단지 위주로 역전세가 심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현정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