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모인 유럽 축구 리그가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로 도배돼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꿈의 무대로 불리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이탈리아 세리에A, 스페인 라리가 등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기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8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은 이날 잉글랜드축구협회(FA) 3라운드 맨체스터 시티와 첼시의 경기에서 '동성애 혐오' 구호가 울려 퍼져 FA가 조사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경기는 맨시티의 에티하드 스타디움에서 진행됐으며 맨시티가 첼시를 4-0으로 꺾고 대승했다. 문제는 이날 경기에서 맨시티 일부 팬들에 의해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구호가 섞인 노래가 불려진 것이다.
BBC는 맨시티 팬들이 외친 구호를 밝히지 않았지만, 현지 다른 언론들은 '렌트 보이(rent boy)'라고 전했다. '렌트 보이'는 남자 매춘부를 의미하는 단어로, 주로 첼시 임대 선수들을 조롱할 때 쓰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동성애 혐오 구호로 바뀌었다고 한다.
동성애 혐오 구호는 지난 7일에도 논란이 됐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에버턴이 FA컵에서 만났고, 맨유가 3-1로 승리했다. 그러나 맨유 팬들은 경기 후반부에 에버턴의 프랭크 램파드 감독을 향해 "렌트 보이"라고 외치며 조롱했다. 램파드 감독이 2001~2014년 첼시에서 선수생활을 했는데 이를 조롱한 것이었다. 맨유는 성명서를 통해 "모든 형태의 차별과 마찬가지로 동성애 혐오는 축구계에 설 자리가 없다"고 규탄했다.
그럼에도 불과 이틀 만에 또다시 동성애 혐오 발언이 축구장에 퍼졌다. FA는 경찰과 검찰에 적극 협조해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FA는 "우리는 모든 형태의 차별에 단호히 반대한다. 우리는 영국 축구가 다양성을 포용하고 경기장 안팎에서 혐오스러운 행위에 맞서 모두에게 안전한 환경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맨시티도 성명을 내고 "소수 팬들의 행동을 강하게 규탄한다"며 "우리는 축구의 포용성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모든 팬들이 환영받고 받아들여지며 멋진 경기를 경험하는, 긍정적인 환경과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4일 리그 경기 중 인종차별 구호에 한 선수가 눈물을 흘리며 경기장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눈물을 흘린 선수는 레체 소속 카메룬계 프랑스인 사무엘 움티티(29)다. 그는 2022~23시즌 세리에A 16라운드 라치오와 경기에서 라치오 팬들의 인종차별 구호를 들어야만 했다. 움티티의 팀 동료인 잠비아계 공격수 라멕 반다도 타깃이 됐다.
두 사람을 향한 인종차별 구호에 주심은 후반전 경기를 중단했다. 경기장 안에는 "인종차별 구호를 중단하라"는 내용의 안내방송까지 나왔다. 그러자 움티티는 눈물을 흘리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러나 움티티는 다시 돌아와 경기를 재개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자 레체 팬들은 움티티의 이름을 외치며 인종차별 구호를 덮어버렸다. 경기장에 다시 들어선 움티티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결국 이날 경기는 레체가 2-1로 승리하며 라치오 일부 팬들의 목소리를 지워버렸다.
지아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인종차별적 구호를 규탄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움티티, 반다와 연계한다"며 "인종차별 반대를 큰 소리로 외치자. 모두 일어나 그들을 침묵시키자"고 강조했다. 라치오도 "이 비열하고 수치스럽고 시대착오적인 행동의 가해자들을 규탄한다"면서 "언제나처럼 구단은 책임자를 밝히는데 최대한 협조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스페인 라리가도 인종차별 구호가 떠나지 않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 소속 비니시우스 주니오르(23)는 지난해 12월 30일 바야돌리드와 2022~23시즌 라리가 15라운드 원정 경기에서 인종차별 공격을 당했다.
비니시우스는 이날 레알 마드리드가 1-0으로 앞서가던 후반 43분 루카 모드리치와 교체됐다. 그가 벤치 쪽이 아닌 정반대 편에 서 있었는데, 바야돌리드 선수들은 그에게 가까운 터치라인으로 나가라고 액션을 취했다. 주심이 비니시우스에게 가까운 터치라인으로 나가라고 지시했고, 그는 그렇게 나와 그라운드를 돌아야 했다.
이때 사건이 발생했다. 바야돌리드 팬들은 비니시우스에게 "원숭이 빨리 나가"라고 소리쳤다. 심지어 비니시우스는 관중석에서 날아오는 물병 같은 걸 발로 걷어찼다. 레알 마드리드의 골키퍼 티보 쿠르투아가 팬들과 비니시우스를 말리며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분위기는 격화됐다.
당시 이러한 모습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퍼지며 논란이 됐다. 꿈의 무대로 불리는 한 곳인 라리가에서, 그것도 축구장 안에서 인종차별이 자행돼 전 세계 팬들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니시우스는 지난해부터 '춤 세리머니' 등을 이유로 인종차별 타깃이 되어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비니시우스는 자신의 SNS에 라리가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그는 "라리가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을 계속 경기장에 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들이 세계 최고의 클럽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라며 "라리가는 계속해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라리가 스타의 발언은 스페인을 발칵 뒤집었다. 그러자 하비에르 테바스 라리가 회장이 입을 열었다. 다만 비니시우스의 날 선 발언에 선을 그었다. 그는 SNS에 "라리가는 수년간 인종차별과 싸우고 있다. 비니시우스의 발언은 매우 유감스럽고 불공평하다. 좀 더 알고 말할 필요가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우리는 SNS에 게시된 인종차별성 발언을 인지했고, 다른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폭력범죄 방지위원회와 검찰에 넘길 것"이라며 "라리가는 폭력,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에 계속해서 맞서 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라리가는 뒤늦게 레알 마드리드-바야돌리드 경기에서 있었던 인종차별 사건에 대해 법원에 정식으로 고발했다. 라리가는 "무관용 원칙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브라질 레전드이자 레알 마드리드 소속이었던 호나우두는 자국 출신 후배를 지지했다. 그는 SNS에 "한탄스럽고 용납할 수 없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우리를 대표할 수 없다"며 "우리는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비니시우스를 지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