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라고 하면, 현대인들은 주로 대개 유가·도가·법가 등을 떠올리지만, 춘추전국시대에는 병가(兵家)·명가(名家)·음양가(陰陽家) 등도 맹위를 떨쳤다.
전국시대, 진나라와 조나라가 이런 군사적 합의를 한 적이 있다. "진나라가 하는 일을 조나라가 돕고, 조나라가 하는 일을 진나라가 돕는다." 얼마 뒤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했는데 조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위나라를 도왔다. 이에 진나라 임금은 약속을 어긴 조나라에 항의했다. 곤란해진 조나라 임금에게 공손룡이 조언했다. "진나라 임금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우리가 지금 위나라를 돕는데 진나라는 왜 우리를 돕지 않습니까. 약속을 어긴 것은 바로 진나라가 아닌지요."
이런 묘책을 제시한 공손룡은 명가(名家)에 속한다. '명가'는 현대의 논리학에 비견되는데 '백마비마(白馬非馬)'라는 변론은 지금도 유명하다. 요지인즉, 백은 색을 가리키는 개념이고 말은 형태를 가리키는 개념이므로 백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가'는 기존 사유를 파괴하는 참신한 논리를 구사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실생활과 유리된 언어 유희는 '궤변(詭辯)'으로 흘러갔고 마침내 역사에서 사라졌다.
문득 '궤(詭)'라는 글자를 주목하게 된다. 주지하듯 궤변은 얼핏 옳아 보이지만 잘못된 추론에 기반한 말로서 거짓말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점에 유의해서 '손자병법'의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라는 유명한 구절을 분석해 보자. 대다수 해설서에는 '궤도'를 '속임수'라고 설명하면서 '전쟁은 속임수'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궤변'이 거짓말이 아니듯, '궤도' 역시 기만이나 속임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궤도'는 모종의 철학적 개념으로 '정도(正道)'나 '상도(常道)'에 반하는 의미로 '권도(權道)'와 상통한다. 손자의 말은 전쟁은 비일상적이고 비윤리적인 상황이므로 거기에 맞게 방책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문을 보면 '궤도'에 대한 예시에서 "적이 충실하면 방비하고 적이 강하면 피하라"고 말했는데, 이를 사기라 할 수 있는가. "전쟁은 수 싸움"이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봐야 한다. 문해력의 빈곤에서 비롯된 오독과 과장된 표현이 횡행하니 개탄스러울 뿐이다. 손자는 누구를 속여서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평소에는 군사 관련 현안을 꼼꼼히 점검하고 전문성 제고에 주력하며, 교전 시는 기후와 지형을 따지고 국제정세를 읽으라고 주문한다.
이렇듯 말이란 하기도 힘들지만 알아듣기도 힘든 것 같다. 맹자는 '지언(知言)', 말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사람을 속이는 말로 그가 제시한 네 부류는 다음과 같다. 공정하지 못하고 편벽된 말 '피사(詖辭)'. 이것에 속으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게 된다. 사방에 침을 튀기며 난사하는 '음사(淫辭)'는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다. 정도가 심해지면 '사사(邪辭)'가 된다. 요샛말로 '흑화'됐다고 한다. 궁색하게 책임을 피하려고 말을 바꿔 가며 핑계 대는 '둔사(遁辭)'도 있는데, 말이 늘 바뀐다는 특징이 있다. '명가'의 행태를 분류해 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기실 우리에게 '피음사둔'은 일상이다. 세간에 넘치는 담론들 대부분이 여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레거시 미디어는 물론, 자유와 민주의 장이 되리라 기대했던 인터넷 공간 역시 골목마다 야바위꾼들의 고함과 댓글 도배질에 난장판이 되었다. 명가의 궤변 정도로는 '좋아요' 하나 받기 힘들 것이다. 애당초 논리를 일절 배제하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형국이니 말이다.
맹자의 말마따나 "사람이 말을 쉽게 하는 것은 제 말에 책임진 적이 없기 때문(人之易其言也, 無責耳矣)"이겠지만,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각자가 말귀를 알아듣는 능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