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 참아?' 은밀하고 교묘한 소수자 차별 '미세공격'

입력
2023.01.06 04:30
14면
책 '미세공격'

편집자주

책, 소설, 영화, 드라마,가요, 연극 , 미술 등 문화 전반에서 드러나는 젠더 이슈를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 봅니다.


"명석하고 전과도 없고 잘생겼으며, 주류 사회에 편입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나타났어요. 동화 같은 이야기죠."

2007년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을 앞두고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조 바이든은 후보로 나선 버락 오바마를 이같이 묘사했다. 얼핏 순수한 칭찬으로 들린다. 그러나 흑인 커뮤니티는 즉각 반발했다. 거센 부정 여론에 바이든은 경선 열차에서 중도하차했다.

평생 백인 남성이라는 주류 정체성으로만 살아온 바이든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동료 정치인에 대한 긍정적 언급이 왜 특정 집단의 분노를 야기했는지 지금은 이해할까. 당시 흑인 커뮤니티가 그의 발언에서 예리하게 읽어낸 메타커뮤니케이션(숨은 메시지)은 이렇다. '흑인은 대체로 멍청하고 범법자이며 매력적이지 않은데, 오바마는 예외적 인물이다.'

해를 끼칠 의도가 전혀 없거나 심지어 선의에서 나왔는데도 어떤 행위나 발언은 종종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긴다. 이를 정색하고 대응하면 단순 말실수라거나 혹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냐는 핀잔까지 듣기 일쑤. 하지만 사회의 위계를 면밀히 살피면 다른 해석이 나온다. 주류에 속한 이가 무심코 던진 돌을, 무고한 개구리가 매일같이 맞고 있다면? 단순한 '무지' 혹은 '무례'라고 넘길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은폐됐거나 잠복해 있는 것이다.

언어로 구체화할 수 없어 피해자만 분통 터지고, 가해자는 가해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이 은밀하고 미묘한 차별에 정식 명칭이 붙었다. '미세공격(microaggression)'. 공격의 크기가 작다는 말이 아니다. 법과 제도로 노골적으로 규정된 '구조적 차별(거대공격)'이 아닌, 일상적으로 마주하지만 가시화하기 어려운 '미시적 차별'을 의미한다.

최근 번역 출간된 '미세공격'은 1970년대부터 사용된 '미세공격'이란 용어를 학문적 개념으로 끌어올려 현대 사회의 미묘한 차별 구조를 파헤친다. 대표저자는 데럴드 윙 수 컬럼비아대 상담·임상심리학과 교수. 미국 내 중국 이민 2세대로, 동양인이라 놀림받던 어린 시절 기억이 다문화 연구의 길로 이끌었다. 그가 2010년에 낸 이 저서는 미국 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켜 이후 2만 편 이상의 논문이 쏟아졌고 2017년 '미세공격'이란 어휘가 메리엄웹스터 영어사전에도 등재됐다. 이번 번역서는 리사 베스 스패니어만 애리조나주립대 교수가 합류해 출간 이후 논의들이 보강된 2판(2020년)으로 미국의 현실을 반영해 인종차별 설명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미세공격은 비단 인종뿐만 아니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빈민 등 주변화된 집단에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차별적 행위다. 2023년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낯선 행색의 외국인이 지하철 옆 자리에 앉을 때 부지불식간 몸을 웅크린 적 있는가. '이방인은 불쾌하다'는 편견을 품은 미세공격이다. 동성친구와 친밀한 포옹을 나눈 뒤 "널 사랑하지만 동성애자는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면. 은연중 '동성애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뉘앙스를 드러낸다. "야망이 많다"는 후배 여성을 향한 평가는 어떠한가. 여성은 성취욕이 없다는 고정관념에 근거한다. 중년 남성으로 빼곡한 임원 회의 풍경은, 여성 구성원에게 '우리 조직은 당신이나 당신 같은 부류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발신한다.

과잉 해석 아니냐고? 바로 이 점이 미세공격을 공론화하지 못하게 만드는 대목. 공공연한 차별은 아니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소수자를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한다. 이에 반응하면 되레 피해자를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기 딱 좋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방식으로 사회적 소수자의 삶을 무너뜨린다.

책의 논의가 미세공격을 개념화하는데서 끝났다면, 못내 찜찜한 마음이 들었을 테다. 미세공격이 뭔지 알 수 있지만, 대처법은 까마득할 터. 그러나 이 세심한 저자들은 사전 예방부터 사후 수습까지 '행동 지침'을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담았다. 하여 이 이론서는 소외된 이들이 미세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토록 하는 실용적 무기로 거듭난다.

핵심 지침 하나. 미세공격을 감지했다면 그것에 '미세공격'이라 이름을 붙이자. 실체 없던 공격 행위가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난다.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가해자의 추가 행동을 차단하는 근거자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실마리다. 단 한번이라도 약자의 위치에 놓인 적이 있다면, 책을 덮은 뒤 외치리. "유레카! 그때 애매하게 거슬리던 게 바로 이거였어!"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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