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하나는 푸틴, 하나는 성차별"... 우크라이나 여성들 '두 개의 전쟁'

입력
2023.01.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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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전선에서 뛰었던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러시아의 침공 후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섰다. 공식 집계된 적은 없으나 우크라이나군에 몸담은 여성은 5만 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두 가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조국 해방과 여성의 해방.

"여성들은 러시아군, 그리고 성차별과 싸운다"

"이전에는 '단어'가 무기였지만, 지금은 AK-74 소총이 무기다."

기자였던 우크라이나 여성 마리나 몰로슈나(23)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런 글을 남기고 국토방위군(예비군)에 합류했다. 기자로 몸담았던 언론사가 위치한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마리우폴이 지난해 5월 러시아에 점령되자 최전방에 자원했다.

마리나는 전장에서 두 가지 싸움을 했다. 적과의 전투,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차별·편견과의 전투였다. 그는 '여성 군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영국 BBC방송에 말했다. 그는 "군인이 남성이라면 자연스레 존경이 따라붙지만, 여성은 까다로운 평가 끝에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인터뷰한 우크라이나 여성 특수부대 저격수 3명도 군인의 자격을 스스로 입증해야 했다. 우크라이나 군 당국은 여성 저격수 기용에 회의적이었다. 이들을 비롯해 수십 명의 여성 저격수가 활약하자 "여성은 민첩하고, 인내심도 뛰어나 저격수에 제격"이라고 평가를 바꿨다.

우크라이나는 최근 들어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여성 영웅'을 내세우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역시 여성 군인을 여러 번 치켜세웠다. 지난해 9월에는 텔레그램에서 "우크라이나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서 조국을 수호하고 가장 어려운 임무를 수행한다"고 했다.

전쟁 장기화에 '젠더 장벽' 낮춘 우크라이나군

젤렌스키 대통령의 깨달음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가부장제가 만연했던 구소련의 영향을 받아 성평등 면에서 뒤떨어졌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세계 각국의 성평등 수준을 평가해 매년 발표하는 성격차지수(GGI)가 지난해 146개국 중 81위였다.

군 문화도 폐쇄적이었다. 2018년 '군 성평등법' 입법 전까지는 여성의 전투병과 복무가 금지될 정도였지만, 러시아발 안보 위협이 계속되자 문턱을 낮췄다. 이번 전쟁이 길어지면서 여러 전투병과에 여성이 배치됐고, 포병부대 최초의 여성 지휘관도 탄생했다.

우크라이나군은 그러나 '여성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여성용 표준 전투복이 없어 여성 군인들은 작은 치수의 남성 군복을 끈으로 몸에 고정한 채 전투에 나서야 했다. 성별을 이유로 군 복무를 거절당하는 일이 전쟁 중에도 여전히 일어났다. 아나스타샤 블리시크(26)는 "군 관계자로부터 '여자는 집에 돌아가 아이나 낳아라'라는 말을 듣고 다른 부대를 찾아야 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전쟁 이후 남성들은 여성을 다르게 대하게 될 것"

여성 군인을 돕는 것은 군복을 입지 않은 여성들이다. 러시아 침공 이후 조직된 자원봉사 단체 젬리아스키(Zemliachky·여성 동료)는 여성 군복과 군화를 제작하고, 군에서 지급하지 않는 여성용 속옷이나 생리용품 등을 전달한다. 군대 내 성차별로 인한 공백을 메우는 방식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이들의 취지다.

여성들의 전쟁 참여는 우크라이나와 여성들의 미래를 바꾸고 있다. 젬리아스키의 공동설립자 크세니아 드라하니우크는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과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행동이 바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8년 우크라이나에서 군대 내 성평등을 지지하는 여론은 53%(키이우 국제사회학 연구소 조사)였지만, 지난해 같은 조사에선 80%까지 높아졌다.

전혼잎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