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고두심은 어떤 드라마에서도 늘 한결같다. 캐릭터나 연기적 표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극을 지탱한다. 고두심과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이 유독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일 테다. '우리들의 블루스'에 이어 '아일랜드'까지, 고두심의 존재감은 언제나 뚜렷하다.
지난달 30일 공개된 티빙 '아일랜드'에서 고두심은 신령한 존재 금백주 역을 맡았다. 판타지 세계관 속 중심을 잡고 인물들을 아우르는 역할이다. 앞서 배종 감독은 고두심의 캐스팅을 두고 "고두심 선생님이 캐스팅을 흔쾌히 받았다. 선생님이 나오면 무게감이 잡힌다"면서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주로 조연을 맡는 고두심이지만 최근 종영한 드라마 '커튼콜'에서는 주연의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극중 고두심은 국내 굴지의 호텔 체인 호텔 낙원의 설립자이자 총수인 자금순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작품이 시한부 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한 전대미문의 특명을 받은 한 남자의 사기극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 만큼 고두심의 역할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자금순이라는 인물이 10대에 광복을 맞이하고 6·25 전쟁으로 20대를 시작하며 격동의 한국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인물이기 때문에 인물의 깊이감을 다채롭게 표현해야 했다. 여기에 고두심은 남편, 아이와 생이별한 아픔과 손주들을 자애로 품는 감정선을 형형색색으로 표현해내면서 '커튼콜'의 서사를 이끌었다. 특히 시한부라는 설정을 특유의 감성으로 살려 보는 이들에게 먹먹한 여운을 남겼다.
고두심이 아닌 자금순이 떠오르기 어려울 만큼의 몰입감이 시청자들을 물들였다. 지난 1972년 MBC 5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고두심은 올해로 데뷔 51주년을 맞았다. 그는 드라마 '전원일기' '인어아가씨' '꽃보다 아름다워' '한강수타령' '춘자네 경사났네' '거상 김만덕' '결혼해주세요' '최고다 이순신' '엄마의 정원' '부탁해요, 엄마' '디어 마이 프렌즈' '계룡선녀전', 영화 '아침에 퇴근하는 여자' '깃발 없는 기수' '엄마' '가족의 탄생'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멜로 영화 '빛나는 순간'을 통해 지현우와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고두심의 특별한 점은 그가 '국민 엄마'가 아니다. '국민 엄마'로 불릴 만큼 다수의 작품에서 누군가의 엄마를 맡았지만 여기에 국한되지 않고 더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다. 앞서 '아일랜드'의 신령 역할을 비롯해 평생 물질을 하며 생계를 책임져 온 70세 해녀까지 매년 스펙트럼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의 전성기는 사실 그리 빠른 편이 아니다. 한 방송에서 고두심은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만개 시기를 두고 "40대인 것 같다. 일도 많이 했지만 힘도 좋았다. 40대 넘어서 3개 방송국 대상을 다 받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모든 작품에 기억에 남는다"고 돌아보기도 했다.
워낙 많은 작품을 거쳐온 까닭에 캐릭터가 반복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고두심은 이 안에서 디테일한 차별점을 부각시키고 그 작품의 결에 맞는 새로운 연기를 매번 선보인다. 그간 예능 출연을 지양하고 연기 인생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다큐멘터리 '고두심이 좋아서'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누구보다 따스한 '국민 엄마'의 고백은 많은 이들에게 드라마 못지않은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