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과 직원들이 함께 쓰는 '위키피디아형' 신년사

입력
2023.01.01 20:00
25면

편집자주

보는 시각과 시선에 따라서 사물이나 사람은 천태만상으로 달리 보인다. 비즈니스도 그렇다. 있었던 그대로 볼 수도 있고, 통념과 달리 볼 수도 있다. [봄B스쿨 경영산책]은 비즈니스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려는 작은 시도다.

2023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새해 첫날 새벽 추위 속 붉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소원성취를 기원한다. 개인적으로 술, 담배를 끊겠다거나 취직, 진학, 사업번창 등과 같은 성과추구형 발원뿐만 아니라 해오던 일을 더 열심히 잘해보겠다고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예로부터 신년을 맞아 국왕들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발원하는 제를 올리곤 했다. 이러한 연례행사는 요즘도 변함없다. 크고 작은 조직의 최고경영자들은 신년사를 공표하는 일로 덕담과 함께 새해 첫날을 시작한다.

신년사에는 조직(국가·기업·개인)의 향후 나아갈 방향과 원칙이 있기 때문에 중요할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 주변국 수장들이 발표하는 신년사에 큰 관심을 갖고 여러 해석을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기업 최고경영자도 신년사를 통해 신사업 도전을 선언하기도 하고, 변화혁신의 방향을 천명하기도 한다. 1975년 선경사보 신년사에 고 최종현 회장은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수직계열화(vertical integration)를 공표했다. 이것은 모든 임직원이 정유사업 진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했으며, 원사제조 및 직물회사였던 선경이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여 종합석유화학 회사 ㈜유공으로 탈바꿈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캐시카우 ㈜유공을 기반으로 선경은 이동통신사, 반도체 회사를 인수하며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신년사는 경영환경 변화에의 대응 방향이나 방식을 이야기하고, 투자자 등 외부 이해관계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최근 기업경영자들은 신년사에서 디지털 전환, 신사업 진출, 넷제로 ESG경영 등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한편 신년사 행사는 정치적 메시지 전달의 상징적 수단도 된다. 2019년 현대자동차 신년사 연설을 당시 부회장이 한 것은 본격적인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신년사에는 좋은 말이 가득 담겨 있다. 정치인들은 희망, 평화, 화합, 개혁 등 다소 모호한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반면, 기업 CEO는 미래 사업 진출, 경쟁력 강화, 조직시스템 및 기술혁신, 위기(역경) 극복 등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한다. 신년사에 담는 가치들은 '기업가정신'의 개념들과 많이 일치한다.

매년 하는 신년사는 최고경영자들이 자신의 기업가정신을 재점검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조직구성원들이 연초 최고경영자의 신년사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신년사가 최고경영자의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행사로 끝나 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한국 기업들의 신년사는 수십 년 동안 최고경영자가 대내외적으로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해오고 있다. 시무식에서 기립해 있는 직원들을 향해 연설하거나 이메일 또는 사보로 발송한다. 최근에는 코로나 팬데믹 영향으로 온라인 방식, 영상 방식, 온·오프라인 병행방식, 메타버스 플랫폼 기술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내용의 일방적 전달인 것은 여전하다.

좀 더 실효적인 신년사가 되려면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여 만들어 내는 신년사일 필요가 있다. 2022년 1월 초 코오롱그룹의 신년사 행사는 주목할 만하다. 그룹 최고경영자에 의한 톱다운식 일방적 시무식을 했던 기존 형식을 깨고, 계열사 신임 상무보가 신년사를 대표 발표한 것이다. 코오롱그룹은 '사원에서 최고경영자(CEO)까지 직급과 지위를 불문하고 매년 우수한 성과를 낸 임직원이 신년사를 직접 발표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시도다. 다만 우수성과 사원을 앞세워 성과달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구성원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켜 공감받을 수 없는 신년사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새해 아침의 신년사가 모든 조직구성원들이 참여하여 최고경영자와 함께 만드는 '위키피디아형 신년사'라면 어떨까? 최고경영자와 임직원 모두 함께 만든 신년사는 1년 내내 조직에서 살아있게 되고 미래를 향한 집단적 에너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춘우 서울시립대 교수·(사)기업가정신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