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작가의 탄생을 직감, 심사하다가 환호성을 질렀어요" [동시 심사평]

입력
2023.01.02 04:30
동시 부문 심사평

심사자의 ‘마음 풀밭’으로 막 달려드는 동시를 기대하며, 243명이 보내온 동시 1,250여 편을 읽었다. ‘시심’과 ‘동심’을 균형 있게 밀고 나간 작품들은 다른 작가의 독창적인 상상력이나 문장이 끼어드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저 홀로 우뚝한 세계를 선물한다. 다만 신춘문예 당선작을 선정하는 일은 ‘가장 좋은 시 한 편 고르기’가 아니라 ‘좋은 동시 다섯 편 고르기’라는 점에서 심사자의 고심이 있었다.

작품의 편차가 심해서 믿음이 가지 않는 작품들이 많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어놓고 상상력이라며 우격다짐하는 시도 많이 보였다. 산문 형태의 동시도 적지 않았는데, 문장과 문장 사이에 더 많은 그림이 그려져 탄력을 주면 좋겠다. 어쩌다 한 편을 건져 올리는 작가가 아니라, 늘 좋은 동시를 낳는 역량 있는 작가를 뽑으려고 고심했다.

최종심에 올랐던 응모자는 총 5명. ‘탈출’ 외 7편을 응모하신 분의 동시는 밝고 건강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읽는 이를 미소 짓게 하는 승화점을 알고 있었다. 시적 문장이 더 탄탄한 긴장감을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상한 소문' 외 4편 응모자의 작품은 행간의 속도가 빠른 시일수록 좋았다. 생각과 손에 힘이 들어간 시들은 상상력의 공간은 넓었으나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생기를 잃지 않는 단단 한 시를 기대한다.

‘말린 꽃잎에 적힌 비밀’ 외 4편을 응모하신 분의 동시는 상상력의 세밀함이 좋았다. 동시에서 다루기 힘든 마음의 결을 차분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작품의 편차가 컸다. 창작의 열정을 넘어, 선별하고 버리는 냉철한 결단이 필요하다. ‘살구’ 외 4편을 응모하신 분은 일상의 얘기를 신선한 동시로 잘 옮겨왔다. 친밀한 내용일수록 작가만의 시각과 적확한 시어가 장치돼야 한다.

당선작은 '토끼 꺼내기'로 뽑았다. 총 5개 작품을 낸 당선자의 첫 작품을 읽는 순간, 심사자는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큰 작가의 탄생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뒤편의 작품을 읽어 나갈수록 타작이 섞여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신뢰가 더 깊어졌다. 문장을 끌어가는 힘에서 오랫동안 글을 써온 노력이 엿보였다. ‘생각’이란 작품을 올릴지 ‘토끼 꺼내기’를 밀지, 즐거운 고민을 했음을 밝힌다. 작품의 마지막을 똬리처럼 틀고, 달무리처럼 높게 넓게 마무리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적어둔다. 한국 동시단의 큰 별이 되어 주길 바란다.

좋은 동시는 동시를 쓴 작가 자신을 또렷하게 마주본다. 스스로 작품을 선별하는 눈을 갖추어, 자신의 마음 풀밭을 오래 경작하길 바란다. 새 얼굴과 함께 동시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심사위원 이정록, 김미혜(공동 집필)


※2023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작 '토끼꺼내기'는 다른 신문에 중복 투고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응모 요강에 따라 당선이 취소됐습니다. 다만 본심에 오른 다른 4개 응모작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포함된 심사평은 기사 게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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