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공세' 젤렌스키 "미국이 수백만명 살려달라"... 25분간 영어로 연설

입력
2022.12.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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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분 영어 연설, "호소력 키워" 호평
바이든 '버선발 마중'…의회는 연설 내내 환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간절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300일 만인 21일(현지시간) 군 통수권자로서 조국을 비우고 미국을 방문하는 파격적 결정을 한 그는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한 듯했다. 정장 대신 야전복 차림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영어 연설과 선물로 예산 승인권을 쥔 미국 상하원 의원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의원들은 '미국식 자유와 정의'의 아이콘이 된 젤렌스키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했다.

'전시 복장' 입고 온 젤렌스키…현관으로 마중 나간 바이든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방색이라 불리는 진녹색 점퍼와 티셔츠, 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은 채 워싱턴 백악관에 도착했다. 전쟁 중인 국가의 지도자라는 사실이 한눈에 보이는 차림이었다.

바이든 대통령과 배우자 질 바이든 여사는 백악관 현관 앞에 나가 젤렌스키 대통령을 맞이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악수한 뒤 어깨에 손을 두르며 단결을 과시했다. 우크라이나 국기 색인 파란색과 노란색이 섞인 넥타이도 맸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정상회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거듭 감사의 뜻을 표했다. 미국이 지원한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 포대를 지휘하는 우크라이나군 대위의 무공훈장을 바이든 대통령에게 선물로 전달했다. "대위가 매우 용감한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상찬도 잊지 않았다.

지원 호소 연설에 기립박수·환호 보낸 의회

이어 국회의사당으로 향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의원들을 대상으로 25분간 영어로 연설했다. 국가 지도자가 공식 연설에서 자기 나라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연설이 통역을 거쳤다면 이만큼의 감정적 동요는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라며 "젤렌스키의 능숙한 영어는 우크라이나에 큰 자산"이라고 평가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1년 1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전쟁 선포 요청 연설을 인용했다.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미국 국민은 정의로운 힘으로 절대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했듯, 우크라이나 국민도 절대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치르고 있는 전쟁을 1944년 겨울 미국이 벨기에의 아르덴에서 독일을 격퇴한 '벌지 전투'에 비유하기도 했다.

연설을 마치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동부 바흐무트에서 전투 중인 군인들이 서명한 우크라이나 국기를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에게 건넸다. 그는 "군인들이 이 국기를 수백만 명을 살릴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진 미 의원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며 "이 깃발을 여기에 두고 그런 결정을 내려달라"고 당부했다. 펠로시 의장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어 보였다.

의원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에 수차례 기립박수와 뜨거운 환호로 답했다. "백지수표식 지원은 지지하지 않는다"던 공화당의 케빈 매카시 하원 원내대표도 박수를 보냈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우크라이나를 꼭 지원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오늘 연설을 통해 (필요성을) 분명하게 알아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극비리에 이뤄졌다. 그는 20일 바흐무트를 거쳐 폴란드까지 기차로 이동한 후 미 공군 수송기를 탑승한 것으로 보인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공중조기경보기와 미 공군 F-15E 전투기가 젤렌스키 대통령이 탄 군용기를 엄호한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미국 방문은 불과 사흘 전인 18일 최종 결정됐다고 미 정부는 밝혔다.

장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