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카타르 월드컵 한일 8강전이 성사되길 바랐지만 또 다른 이들은 정반대 생각을 했다. 16강 상대 브라질, 크로아티아 벽이 높아서만이 아니다. 한일전에서 패했을 때 리스크가 워낙 커서다. 승리하면 기쁨은 배가 되지만 패하면 뒷감당이 안 된다. 포르투갈을 누르고 16강에 진출한 감동은 온데간데없이 ‘카타르의 치욕’으로 기억될 테니. 한일전에서 패한 대표팀은 역적으로 몰릴 거다. 한일관계 특수성 때문이다.
한일 현안을 다루는 외교부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잘해도 본전이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후폭풍이 거세다. 다른 사안에서 용인될 실수가 털끝만큼도 허용되지 않는다. 일례로 일본 총리가 우리 대통령보다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과 1분이라도 먼저 통화하면 난리가 난다. 그래서인지 대일관계를 담당하는 아시아태평양국의 행보는 늘 조심스럽다.
외교부를 출입하며 극단적 여론과 거리를 두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외교는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꼬투리 잡기식 접근으로 반일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문재인 정부 때 경험도 컸다. 여론만 의식해 극일(克日)을 외치고, 위안부 합의를 대책 없이 파기했지만 무책임하게 수습도 못 했다. 정권 말기 이를 주워 담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올 8월 일본 전범기업과 강제동원 피해자 사이에서 배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외교부가 대법원에 판결을 미뤄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할 때도 이해하려고 애썼다. 판결이 확정되면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은 압류된다. 사실상 재판 개입이었지만 외교부의 궁여지책이라 믿었다.
그런 외교부가 최근엔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국민훈장 수상을 막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피해자 권리 회복에 힘쓴 양 할머니 서훈을 추진했는데 외교부가 “부처 간 사전협의가 필요하다”며 국무회의에 상정조차 못 하게 한 거다. 대통령이 수여하는 서훈인 만큼 국무회의를 거쳐야 한다.
문제는 외교부에 그럴 권한이 없다는 거다. 양 할머니가 외교부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배상 해법 마련과 서훈 수여는 별개다. 인권위가 서훈을 추진하는데 외교부 허락이 왜 필요한가. 외교부가 관련 의견을 제시한 것도 처음이다. 오지랖 넓게 월권을 행사할 만큼 한가한 부처도 아니다. 일본 눈치를 봤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서훈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외교부는 ‘무슨 자격으로 절차를 문제 삼았냐’는 질문에 끝내 답하지 못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내년에 서훈이 재추진되면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9월 피해자들이 사는 광주를 찾아 큰절을 올렸다. 98세 이춘식 할아버지는 달력에 날짜를 표시할 만큼 만남을 손꼽아 기다렸고 92세 양 할머니는 자필 편지까지 썼다. 이에 박 장관은 “진정성 있게 문제를 풀겠다”고 했다. 외교부는 틈만 나면 고령의 피해자들을 감안해 긴장감 있게 해법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모두 할리우드 액션이었던 건가. 일본은 조선인이 강제노역에 동원된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7년 전 군함도가 등재될 때처럼 이번에도 일본 뜻이 관철되면 외교부는 유감을 표할 거다. 그러면 그때 외교부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못 믿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