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오후 4시 30분 ‘경북 구미 3세 여아 사망 사건’의 파기환송심 재판이 열린 대구지법 신별관 202호 법정. 대구지법 형사항소1부(부장 이상균)는 5번째로 진행된 유전자 정보(DNA) 검사 결과를 공개하며 “앞서 여러 차례 걸친 DNA 검사 결과와 같이 (숨진 아이는) 피고인 석씨와 친자관계가 성립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대검찰청 DNA 담당관에게 “피고인 석씨가 주장하는 키메라증(키메리즘) 때문에 DNA 검사에서 숨진 아이가 친자관계로 나올 수 있냐”고 물었다. 키메리즘은 한 사람 몸 안에 둘 또는 그 이상의 유전적으로 구분되는 세포가 존재하는 현상으로, 극히 희소한 사례다. 키메리즘을 가진 사람은 조직에 따라 서로 다른 DNA형이 혼합돼 있는 것처럼 관찰된다. 따라서 실제로는 모녀관계인데도 DNA 검사에서 모녀관계가 아닌 것으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모녀관계가 아니라면 DNA 검사 또한 모녀관계가 아닌 것으로 나온다. DNA 담당관도 “(DNA 검사에서) 친자관계가 성립했는데 이게 키메리즘 때문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답했다.
앞서 1·2심 재판에서도 키메리즘이 다뤄졌지만, 친자관계로 나온 DNA 결과와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했다. 대법원도 석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구지법으로 돌려보냈지만, 숨진 여아의 친모가 석씨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대법에서 파기환송하면 대부분 무죄를 선고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이 사건은 다시 살펴 사실관계에 최대한 접근하라는 것 같다”며 “출산 등 모든 부분을 처음부터 다시 심리해 실체적 진실을 밝히겠다”고 밝혔다.
석씨는 숨진 아이를 자신의 둘째 딸 김모(23)씨가 낳은 보람이와 바꿔치기한 뒤 진짜 보람이를 빼돌린 혐의(미성년자 약취)와 숨진 아이를 몰래 묻으려다 두려움에 포기한 혐의(사체은닉미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석씨는 경찰이 숨진 아이의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실시한 DNA 검사에서 친모로 밝혀졌지만, 임신한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다.
경찰은 석씨가 외도로 아이를 가진 것으로 보고 관련 증거를 찾는 데 주력했다. 당시 사용한 휴대폰이 중고 거래를 통해 베트남으로 팔려나갔다는 사실에 곧바로 현지로 수사관을 보냈을 정도로 수사력을 쏟아부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석씨의 진술은 하나둘 거짓으로 드러났다. 석씨는 보람이가 태어난 2018년 3월 전후로 “직장을 그만둔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고, 가족들에게도 “자신과 이름이 같은 직원이 퇴사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석씨는 보람이가 태어나기 두 달 전,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경찰 수사결과 밝혀졌다. 오히려 회사에서 “근무기간이 1년도 안 돼 퇴직금이 지급되지 않으니 조금만 더 일하라”고 만류했는데도, 퇴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석씨는 휴대폰에 임신부들이 주로 이용하는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한 기록이 나왔는데도 “앱을 다운받은 기억이 없다”며 부인했다. 이 밖에 매번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생리대를 구입하다가 2017년 7월 1일부터 2018년 7월까지는 구매한 내역이 존재하지 않고, 2017년 7월 가슴축소 브래지어와 보정속옷을 주문해 착용한 사실이 확인됐다.
임신과 출산 증거를 확보한 경찰은 이번에는 석씨가 아이를 몰래 바꾼 시점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경찰은 보람이가 태어나고 하루 지난 2018년 3월 31일과 다음 날인 4월 1일 사이에 두 아이가 바뀐 것으로 추정했다. 산부인과에서 매일 측정해 기록한 아이의 몸무게가 하루 새 ①다른 날의 최대 변동치인 0.06㎏보다 훨씬 많은 0.225㎏나 줄어든 점 ②3월 30일 촬영된 사진에는 보람이 발목에 채워진 신생아 식별띠가 4월 1일에 찍힌 사진에는 빠져 있는 점 ③4월 2일 자정에 채취한 아기의 혈액이 유전법칙상 석씨한테서만 나올 수 있는 혈액형이란 사실을 근거로 삼았다.
1·2심은 DNA 감정 결과, 바꿔치기가 의심되는 기간에 아기 발목에 있던 인식표가 훼손된 점, 그 시기 아기 몸무게가 줄어든 점, 산부인과 구조상 외부인이 드나들기 쉬웠던 점을 근거로 석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목격자 진술이나 폐쇄회로(CC)TV 영상 등 직접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유전자 감정 결과만으로 공소사실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미성년자 약취로 판단하기 위해선 석씨의 목적과 의도, 행위 당시 정황, 수단과 방법, 피해자 상태 등에 대한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숨진 아이가 석씨 친딸은 맞지만, 바꿔치기를 했다는 미성년자 약취 혐의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숨진 아이의 사진 속 귀 모양 변화를 근거로 경찰이 주장하는 3월 31일~4월 1일이 아닌, 4월 24일 전후로 아이가 바뀌었다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에는 1·2심과 마찬가지로 ‘석씨를 엄벌에 처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가 들어오고 있다. 언니를 엄마로 알고 살다 숨진 아이는 전기와 가스마저 끊겨 어둡고 차디찬 빌라에서 종일 홀로 지내다 숨을 거뒀다. 김씨는 아이가 24개월이 되던 2020년 3월부터 반년간 빵 6~10개에 죽 1개, 우유 4개가량을 방 안에 두고 나올 뿐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동거남의 아이를 임신해 배가 불러오자 이마저도 갖다 주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매달 10만 원의 양육수당까지 챙겼다. 석씨는 둘째 딸 김씨가 살던 빌라의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었고, 딸이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살며 임신까지 한 사실을 알면서도 딸의 사정을 살피지 않았다. 보람이가 태어나고 김씨에게 위층으로 이사를 오도록 권유한 사람도 석씨였지만, 딸이 집세와 각종 공과금을 체납한 사실을 알고도 무관심했다.
사건의 장본인인 석씨가 전혀 입을 열지 않으면서, 숨진 아이가 왜 언니의 딸로 살다 죽음에 이르렀는지, 진짜 보람이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경찰은 2018년 이후 3년간 영유아 변사 및 실종사건을 확인하고, 구미시와 인근 지역 보육시설을 상대로 석씨의 둘째 딸과 비슷한 아이가 있는지 탐문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두 엄마'에게 버림받아 죽은 보람이와 달리 진짜 보람이는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답은 석씨만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