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코앞에서 석유 밀수

입력
2022.12.19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이달 1일 오후 서해상 한중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 부근 우리 해상에서 두 선박이 나란히 정박했다. 한 척은 국내 A사가 러시아에서 용선한 유조선 '머큐리호'로 지난달 20일 군산항을 떠나왔다. 다른 한 척은 홍콩 회사 소유로 지난달 12일 대만해협 쪽에서 출항한 '션들리호'였다. 몇 시간의 접선 뒤 머큐리호는 선체가 가벼워져 흘수선(수면과의 경계)이 낮아졌다. 석유를 옮겨 실었을 션들리호는 나흘 뒤 북한 EEZ 해상에서 발견됐다. 크레인 달린 바지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선박과 밀착한 모습이었다.

□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가 위성사진과 선박 신호를 토대로 포착한 북한의 정제유 밀수 정황이다. 2017년 9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 2375호에 따라 북한은 석유와 같은 금수품을 공해상에서 환적할 수 없다. 감시가 허술해 유명무실한 제재이지만, 이번 위반 행위는 우리 관할 수역에서 벌어졌고 국내 회사가 빌린 배가 개입돼 그냥 넘기기 어렵다.

□ 이 사건을 보도한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A사는 "어선에 연료를 공급한다는 중국인 중개인과 계약했고, 션들리호 선장에겐 화물이 북한에 양도되지 않을 거란 보증서를 받았다"고 해명했다. 보증서상 상대방은 홍콩 선사가 아니라 중국 상하이에 주소를 둔 또 다른 회사였다. 3년 전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환적 거래가 의심된다며 발표한 선박 명단에 한국이 포함된 전례도 있어서인지, FT는 국내 영세업체의 대북 거래를 의심하는 유엔 관계자 발언을 인용했다.

□ 생각지도 않게 불법에 연루되는 국민도 있을 수 있다. 미국의소리(VOA)는 북한이 2019~2021년 중국이나 홍콩 회사를 내세운 위장거래로 한국에서 중고 선박을 7척 이상 사들인 뒤 북한 선적으로 바꿔 밀수에 동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배가 낡아 팔았을 뿐인데 불법 환적에 개입했다거나 북한과의 선박 매매 금지 규정(결의 2321호)을 깼다며 유엔 제재 위반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안보리는 2017년 말 북한을 멈춰 세우려 정제유 수입량을 90% 이상 줄여 연간 50만 배럴로 제한하는 제재(결의 2397호)를 단행했지만, 북한에서 기름난만큼은 일어날 조짐이 없다. 대북제재의 가장 큰 구멍이다.

이훈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