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발표되었다. 이 시험은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수많은 청춘과 그 가족의 희비를 쥐락펴락한다. 시험을 본 날부터 결과를 듣는 날까지 사회 여러 곳이 '올해의 수능'에 대한 평가로 들썩인다. 흔히 시험이 너무 어려우면 '불수능', 너무 쉬워서 변별력이 떨어지면 '물수능'이라고 표현한다. 올해 시험을 두고 언론에서는 '물국어, 불수학'이란 말까지 했다. 물과 불이 어려움의 정도를 말하는 데 쓰이지만, 이렇게 과목에조차 쉽게 붙을 줄은 몰랐다.
물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사람이 매일 마시는 액체를 우선적으로 이르겠지만, '사회의 물을 먹다'처럼 경험이나 영향을 빗대기도 한다. 사람을 하찮게 보거나 쉽게 생각한다는 뜻의 '물'도 그중 하나이다. '나를 물로 보니?'라고 하면 얕잡아보고 소홀하게 대접한다는 속뜻이 담겼다.
이에 비해 불은 열렬하고 거센 이미지다. 어둠을 밝히는 물체로, 불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 준다. 비록 미래의 일일지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명백한 일을 '불을 보듯 뻔하다'고 한다. 그리고 불은 '몹시 심한'이란 뜻을 더해 준다. 아주 심한 가물은 '불가물', 아주 지독한 깍쟁이는 '불깍쟁이', 몹시 심한 꾸지람은 '불호령'이다.
이처럼 물과 불은 명확하게 대비된다. 물은 낮은 곳을 찾아 흐르지만, 불은 위로 치솟는다. 그래서인지 격렬한 순간들은 불로 표현한다. 못마땅하고 언짢아서 내는 화(火)도 곧 불이다. 한국 사회에는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 한때 도로에서 접촉사고라도 나면 절대로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소리를 질러야 했다. 분노할 만한 일로 관공서에 민원을 제기할 때도 큰 소리로 해야 제대로 먹힌다고 봤다. 그런데 이런 민원 앞에서 소통을 멈추는 사회도 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다고 보기에, 행정 담당자가 도중에 수화기를 내려놓아도 정당한 나라도 있다.
물을 쉬운 일에, 불을 강하고 힘든 일에 빗대는 한국어 표현은 한국인의 소통 방식에 영향을 준다. 물처럼 조용히 말하는 것은 약한 기운이니, 불처럼 강하게 표현해야 상대방이 알아줄 만하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화가 난다고 하여 누군가에게 화상의 흔적을 남길 권리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 물도 불만큼 강하다. 그래서 둘을 아울러 '물불'이라 하면 큰 어려움과 위험이란 뜻이 되지 않는가? 불을 끄는 것은 결국 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