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망측한 제목인가 싶어 놀라서 헐레벌떡 들어왔다면 진정해도 좋다. 그 얘기이기도 하지만, 또 그 이야기만은 아니니까. 나는 청소년기에 교복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짝사랑 열병에 앓던 날이 있었고, 흠모하는 이와 놀이터에서 꽁냥거리고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나눠 먹는 데이트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한참 성인이 된 이제는 놀이터 아닌 놀이공원을 다닐 수 있고, 컵 떡볶이 열 배가 넘는 금액의 배달 떡볶이를 별 고민 없이 시킬 수 있지만 여전히 청소년 시절 연애를 더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그린다. 그저 내가 갖지 못해서 추억 보정이 덧칠해진 점도 있겠지만, 실로 그때만 할 수 있는 것,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그래서 나는 "어른 되고 하면 돼", "나중에" 같은 말이 싫다. 어떤 감정과 추억은 유예되지 않고 나중엔 영영 되찾을 수 없으니까.
이런 개인적 애환을 담아, 요즘 학교에서 '연애'를 주제로 강의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무슨 '짝사랑 성공법' 같은 건 아니고, 연애를 매개로 다양한 성교육을 한다. 대개 '성교육' 하면 몸, 그중에서도 성기에 대한 교육만 떠올리는 경우가 많기에 어리둥절해하지만 성교육은 비단 몸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닌 성적인 욕구와 감정, 성을 매개로 한 관계, 성을 둘러싼 우리 사회 전반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래야만 한다.
그래서 연애는 성교육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필요한 소재다. 우리는 연애를 통해 자신의 성적인 몸과 욕구를 탐구해 나가기도 하고, 매력어필 과정에서 성 역할 고정관념을 답습하다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게다가 연애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통해 권력과 동의를 배우기도 하고, 안타깝지만 때로는 사회적 낙인과 폭력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래서 연애는 성교육 현장에서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할 주제다.
사실 이런저런 당위를 떠나서, 연애를 주제로 수다 떠는 건 얼마나 즐겁고 재밌는가!
매번 딱딱하고 어려운 정규 수업만 듣던 청소년에게 성교육 시간은 두근두근, 설렘 그 자체다. 게다가 주제가 연애라고 하면 교실 뒤쪽에서 엎드려 자던 청소년도 일으키는 기적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시간이 흔치 않다는 것이다.
한 번은 고등학교에서 곧 일 경험을 하게 될 3학년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성희롱 예방교육을 진행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고등학생 대상 교육이 흔치 않은지라 들뜬 마음으로 들어갔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학업과 학교생활에 지친 청소년에게 연말의 학교는 지루할 뿐이었고 꾸벅꾸벅 조는 이들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학교에서 요청한 바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어떻게든 이끌어 가기는 했지만, 막바지에는 답답하다 못해 자괴감이 들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청소년들에게 "어떤 게 궁금해요?"라고 묻자, 수업 내내 엎드려 있던 한 청소년이 빼꼼 고개를 들며 물었다. "성병 걸리면 어떻게 해요?"
비슷한 장면은 또 있다. 최근 한 학교에서 중학교 1, 3학년 수업을 요청했다. 학교 측에 연애를 주제로 수업해보겠다고 제안했으나, 중학교 1학년은 디지털 성폭력 예방교육을 다루고 3학년만 연애를 다루게 됐다. 중학교 1학년은 아직 너무 어리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3학년과 안전한 성관계를 위해 콘돔을 이야기할 때도 직접 콘돔을 보여주는 시연은 하지 말고 PPT 화면만 이용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학부모의 민원을 받을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특정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강사들은 학교와, 또 교육을 의뢰한 선생님과 소통하지만, 막상 교육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을 길이 없다. 그렇다면 학교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잘 대변해주면 좋으련만 현실은 청소년의 요구보다 양육자 또는 보수 개신교 가치관을 지닌 단체들의 민원을 받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래서 성과 관련한 교육 자체를 꺼리거나 혹여나 하더라도 아주 기초적인 몸에 대한 이야기, 혹은 폭력과 관련하여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 그친다.
'성'을 말하기에 어리지 않은 나이는 대체 몇 살일까? 아니 애초에 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은 성을 모르는 '순수'하고 '건전'한 성인으로 자라날까? 그게 과연 순수한 것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차치하더라도, 성과 관련한 각종 정보가 차고 넘치는 이 세상에서 과연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청소년은 이미 성적 주체로 다양한 성적 욕구를 느끼고 성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앞서 사례로 이야기한 중학교만 보더라도 그렇다. 3학년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1학년 학생들도 쉬는 시간마다 주변으로 몰려와서 물었다. "콘돔 끼면 진짜 임신 안돼요?", "섹스할 때 원래 아파요?", "어떻게 하면 성관계를 '잘' 할 수 있어요?" 연애 이야기로 수업을 하면 쏟아지는 질문에 쉬는 시간에도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답변해주느라 쉬지도 못한다. 초등학생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서도 다양한 연애 욕구와 경험이 아주 자연스럽게 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모습을 낯설고 어색해하는 건 오직 그 어린이, 청소년을 바라보는 어른들뿐이다.
마냥 개인 경험만으로 주장하는 건 아니다. 숫자를 통해 그 현실을 엿볼 수 있다. 2019년 발표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총 4,000여 명의 중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연애 경험이 있는 경우는 49.2%이고 첫 연애 연령은 평균 11.6세, 이 중 67.1%가 스킨십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성관계는 어떨까? 2021년 질병관리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관계 시작 연령은 만 14.1세로 대략 중학교 2학년 정도다. 또한 중·고등학생 성관계 경험률 전체 평균은 5.4%이고 고3으로 올라가면 이 비율은 10%를 넘는다. 일견 낮은 비율로 생각되지만, 통계청에서 발표한 중·고등학생 인구가 대략 271만 명이라고 하니까 아주 단순히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도 약 14만 명이 넘는 청소년이 성경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 숫자에는 학교 밖 청소년이 포함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성을 터부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성경험을 밝히기 어려운 청소년의 현실을 고려하면 그 숫자는 얼마든지 더 높아질 수 있다.
이 숫자 앞에서 뜨악해하며, '요즘 것들'이라는 말로 혀를 차고 손가락질하면 문제가 사라질까? 성의 경건하고 성스러움을 찬양하면 달라질까? 나아가 교육기관에서 제대로 성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이 성인이 되면 저절로 성을 안전하고 즐겁게 잘 실천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제는 청소년이 성을 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양육자 교육을 할 때 받는 단골 질문으로 "우리 아이가 '야동'을 보는 것 같은데 어쩌죠?"가 있다. 자신의 자녀가 성적인 존재임을 알게 된 것에 대한 당혹감과 이른바 '야동'으로 부르는 성 표현물의 폭력적인 문화에 노출될 것을 염려한 양육자들의 절박함이 느껴지는 질문이다.
그럼 나는 되묻는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모든 폭력적인 성 표현물을 없애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내 자녀를 무성적 존재로 만들거나 진공 속에서 키워낼 게 아니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다. '야동'이 청소년들의 성에 대한 유일한 정보 습득 창구가 되지는 않도록 해야 한다.
허나 지금 현실에서 양육자는 늘 마지막쯤이다. 앞서 언급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 자료에 따르면, '성에 대한 정보 획득 경로' 중 부모는 2.3%로 '관련서적(1.8%)' 다음으로 낮았다. '성 고민 상담 대상'도 부모는 고작 15.9%로, 혼자(35.2%)나 친구(30.8%)보다도 못했다.
준비가 필요한 건 다양한 역동으로 성을 경험하고 실천하며 배울 의지까지 충만한 청소년이 아닌, 과거에 사로잡혀 소통하지 않고 교육에 훼방만 놓는 어른들이다. 늦어질수록, 외면할수록 청소년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짧아지며 결국 그로 인한 피해는 청소년과 개인에게 전가된다.
지금도 청소년은 열심히 연애하며 사랑하고 있다. 이 청소년과 함께 각양각색의 사랑을 편하게 이야기 나눌수록 성은 더 안전하고 즐거워진다. 못 다 이룬 교복 데이트의 꿈, 더 이상 누군가가 작아지고 빛바랜 교복을 보며 아쉬워만 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 소중한 기회와 시간을 빼앗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