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당일 현장에서 두 명의 친구를 떠나보낸 10대가 49재(16일)를 나흘 앞두고 숨졌다. 극단적 선택으로 추정된다. 유서를 남기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 학생은 참사 후 꾸준히 심리 치료를 받았다. 학교와 병원도 A군의 회복을 성심껏 도왔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14일 경찰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 생존자인 고교생 A군이 12일 오후 11시 40분쯤 서울 마포구의 한 숙박업소에서 홀로 숨진 채 발견됐다. 외부 침입 흔적 등 범죄 혐의점이 없어 경찰은 극단적 선택으로 판단하고 있다. 유서도 없었다.
A군은 10월 29일 참사 당일 친구 두 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그 역시도 현장에서 의식을 잃었다가 누군가 얼굴에 물을 뿌려줘 겨우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병원으로 옮겨져 부상 치료를 받고 학교에 복귀했지만 상당한 심리적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날 A군이 참사 후 교내 심리 상담과 병행해 매주 두 차례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밝혔다. 한 유족은 “세상을 떠난 친구들과 가장 친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10대에게 너무 가혹한 시간이었을 것” “국가와 사회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등 추모 글이 봇물을 이뤘다.
참사 당시 충격이 A군의 죽음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두 달 가까이 참사 후유증에 시달린 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이 누누이 지적해 온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등 살아남은 이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현실화했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국가트라우마센터의 ‘이태원 참사 부상자ㆍ목격자 심리지원 행동 요령’을 보면, 심각한 재난을 겪은 사람은 분노와 불신, 우울증은 물론 죄책감, 자기의심 등의 트라우마 증상을 보인다. 지난달 8일 새벽에도 “이태원 참사 때문에 괴롭다”며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있었다.
실제 정부가 운영하는 국가트라우마센터와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접수된 참사 관련 심리상담 건수는 13일 기준, 1,360건(유가족 912건ㆍ부상자 448건)이다. 같은 기간 전체 상담(4,667건)의 30%나 된다. 국가트라우마센터는 A군에게도 심리 상담이 필요한지 문의했지만, 당시 정신과 진료가 예정돼 있어 치료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트라우마가 장기간 지속돼 나타나는 극단적 형태가 PTSD다.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죄책감 등의 증상이 3개월 넘게 지속되면 PTSD가 만성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3개월이 PTSD 치료의 이른바 ‘골든타임’이라는 얘기다.
불안감이 다소 완화됐다고 안심해서도 안 된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시간차 트라우마’가 찾아올 수 있다. 특히 생존자들에게 발현될 가능성이 큰 증상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참사 생존자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치료에 소극적일 수 있어 정부나 사회가 적극적으로 이들을 점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가적 비극을 정쟁화하고 온ㆍ오프라인에서 이뤄지는 2차 가해도 트라우마에 독약이다. 이태원 참사 역시 여태껏 책임지는 고위공직자 하나 없는 데다, “나라 구하다 죽었느냐”며 희생자들을 향해 막말을 퍼붓는 정치인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사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바로 지금, 좀 더 세심한 피해자 관리가 필요한 이유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사죄하지 않으면 참사 원인은 결국 ‘이태원에 간 우리 아이’, 즉 개인의 잘못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