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 모르는 손님, 단골 만들기

입력
2022.12.11 20:00
25면

편집자주

보는 시각과 시선에 따라서 사물이나 사람은 천태만상으로 달리 보인다. 비즈니스도 그렇다. 있었던 그대로 볼 수도 있고, 통념과 달리 볼 수도 있다. [봄B스쿨 경영산책]은 비즈니스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려는 작은 시도다.

기업이 고객을 감동시키려면 고객을 잘 알아야만 한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려면 회사는 고객을 만나거나 전화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고객의 얼굴도 모른다. 고객도 판매자가 누군지 모른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라는 노랫말이 오늘날 우리 일상을 딱 들어맞게 표현되는 세상이 되었다.

인터넷 비즈니스가 나타나기 전, 오프라인 대면 시장에서는 고객과 사장님이 서로 만나 직접 소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단골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이때 단골손님은 대면 접촉을 기본으로 소규모이고 제한된 범위의 고객들이었다.

1980년 전후 개인용 컴퓨터(PC)가 개발되고 1990년대 이후 인터넷 정보통신기술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고객과 사장님이 직접 만나지 않고 물건을 구매하고 판매하는 온라인 시장이 출현했다. 이러한 가상 공간(virtual space)은 e-market place, 온라인 쇼핑, e-Business로 진화하더니 스마트폰과 인공지능(AI) 기술이 활성화하면서 모바일 쇼핑, 이커머스(e-commerce)라는 용어들을 탄생시키며 새로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고객과 회사는 서로 만날 수 없으니 과거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단골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광범위한 고객의 출현은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곳에서 손님(고객)을 알기란 쉽지 않고, 더구나 고객 수가 많아지면 일일이 기억하고 대응하기도 어렵다. 만나지 못한 고객을 찾아가서 물어보고 고객을 일일이 챙기려면 직원도 많이 써야 하고, 비용도 너무 많이 든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1990년대 중반 데이터 마이닝이라는 정보처리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상에 '데이터'라는 흔적이 쌓이기 시작했고, 이것을 활용하는 기술들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사적 자원관리(ERP: Enterprise Resouce Planning)가 전 세계 많은 기업들로 확산하면서 데이터 기반 경영프로세스의 정확성과 효율성을 향상시켰고, 디지털 정보처리 기술이 고도화해 가면서 고객과의 거래 데이터를 활용하는 '고객관계관리(CRM: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기법이 개발되었다. 가상 시장에서 얼굴도 모르는 손님을 단골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CRM의 기본 대전제는 고객마다 욕구가 다르므로 고객 개인별 맞춤 서비스를 하면 고객만족도가 향상될 것이라는 것이다. 고객별 맞춤 서비스를 하는 것이 CRM의 핵심이다. 그러나 초기 CRM은 관련 제품이나 데이터 처리 솔루션을 도입하는 정도에 머물러, CRM 본래의 철학과 취지를 살리지 못하는 기업들이 많았다. CRM은 조직문화, 내부 조직 프로세스에 대한 변화 관리가 핵심인데 기업들이 CRM이 기술적 도구만을 중시하다보니 CRM의 기본철학인 '단골 관계'라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사실 CRM은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디지털 정보처리기술을 활용한다는 점과 관계를 맺는 고객의 수가 매우 많을 뿐, 아날로그 시대 기업과 고객이 단골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 그 기본철학과 원리는 동일하다.

고객과 사장님이 서로 직접 만날 수 없는 21세기 사이버 세상에서도 사장님과 고객은 서로 믿고 지낼 수 있는 단골 관계를 원하고 있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원리는 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다만 기술적 방법이나 방식이 변할 뿐이다.

이춘우 서울시립대 교수·(사)기업가정신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