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알박기

입력
2022.12.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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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지난 3일 16강 진출 직후 우리 선수들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가 적힌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후 ‘중꺾마’라는 말이 주목받았다. 월드컵은 유행어와 신조어를 만든다. 4강 신화를 쓴 2002년에는 특히 많았다. 붉은 옷을 입고 응원한 젊은이들은 ‘레드세대’ 혹은 ‘R세대’로 불렸고, 히딩크 리더십을 연구하는 ‘히딩크학’이란 말도 생겼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그해 2,696개 신조어가 생겨났다.

□ 월드컵과 관련 없지만, 2002년 생긴 말 중 하나가 알박기다. 개발예정지에서 일부 지주가 매각을 거부하고 버티는 걸 말한다. 비슷한 행태를 꼬집는 중국의 ‘못집’(釘子戶·딩쯔후)이나, 영어의 ‘네일 하우스’(Nail House)를 원용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알박기는 소수의 고집으로 대다수 소유주의 정상적 토지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로 이어지기 때문에 ‘반공유재 비극’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요즘은 소수 횡포를 막기 위해 토지수용제가 정교하게 도입되어 있다.

□ 지난 20년 알박기는 ‘의미의 확장’ 측면에서 언어의 역사성도 실천했다. 토지 소유주의 탐욕 행위를 넘어, 정권교체 후에도 이전 정권 연고자들이 공직이나 공기업 요직에서 버티는 행태도 지칭하게 됐다. 당초 사람·짐승의 다리만을 가리키던 '다리(脚)'가 '책상'이나 '지게' 등 무생물 다리에 적용되고, 음식물 섭취만 뜻하던 '먹다' 동사가 '욕을 먹다. 마음을 먹다. 겁을 먹다' 등으로 확대된 것과 비슷하다.

□ 확장된 의미의 알박기는 올 들어 최고조에 달했다. 고위 공직자들의 버티기 논란 속에 문재인 정권 말기에 임명된 공기업 CEO 상당수가 임기를 고수 중이다. 정권교체 때마다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물러나던 금융지주, 공기업에서 민영화한 기업집단 CEO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BNK, 우리금융, 신한금융 CEO가 돌연 용퇴를 선언하거나 그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사석이었지만 ‘전 정권 청와대와 친분을 과시하던 분들이 경영능력과 상관없이 자리를 고집하는 건 좋지 않다’는 정부 고위관계자 언급도 들린다. 견고하던 알박기 대오에 균열이 가는 모양새다.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