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보다 그대들이 더 귀하다... 축구가 일깨운 '행복론'

입력
2022.12.10 14:00
12년 만의 월드컵 16강 진출, 그보다 값진 성과들
①한국 축구 체질 바꾼 '빌드업', 결과보다 과정의 힘
②냉소 이겨낸 '중꺾마' 정신... 'MZ 언더도그'의 반란
③20대 초중반 '영건'들의 활약, 4년 뒤가 더 설렌다

이기기 어렵다는 건 알았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이는 없었다. 패색이 짙어질수록 광장의 함성은 커져만 갔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승리를 향한 다그침이 아녔다. 지더라도, 매 순간 전력을 다하는 투혼에 보내는 박수였다.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만나 1-4로 대패했지만, 대한민국 선수들도 국민들도 꺾이지 않았다. "저희는 포기하지 않았고, 여러분들은 우릴 포기하지 않았기"(손흥민)에 누릴 수 있는 승리보다 더한 선물이었다.

한국 축구가 달라졌다. 경기를 하는 선수도, 응원하는 국민도 성숙해졌다. 12년 만의 16강 진출은 분명 성공적이다. 대한민국은 그보다 더 중요한 걸 얻었다. 선수들은 '우리의 축구'를 펼쳤고, 국민들은 그 '성장'에 열광했다. 승패에만 목숨 걸고, 욕하며 보기 바빴던 축구에서 이젠 선수도, 국민도 한마음으로 즐기는 축구가 됐다.

지고 돌아올 때마다 선수들은 '죄인모드'였다. 귀국길엔 엿과 계란, 베개가 날아들었고, '한국 축구는 죽었다'는 근조 화환이 사납게 맞았다. 이번엔 달랐다. 죄송하다는 선수들을 향해 팬들은 '죄송 금지', '미안 압수'로 재치 있게 달래며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16강의 결과보다 태극전사들의 땀과 눈물이 귀하다는 걸 깨달아서다.

지난 2주 축구 덕분에, 그렇게 웃고 울었다. 우린 왜 그리도 행복했었나 키워드로 톺아봤다.

※ 2022 카타르 월드컵 관련 기사 링크를 넣어놨습니다. 굵은 글씨에 밑줄 그은 부분을 클릭하시면 열립니다. 태극전사들의 열정과 투혼을 다시 한번 느껴보세요.

결과 넘어선 과정의 힘... "세상에 패배하지 않는 팀은 어디에도 없다"

①그야말로 '졌잘싸'.

위축되지 않았고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강팀을 만날 때마다 수비에 치중한 채 역습만 노렸던 소극적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패스를 돌려가며 공간을 찾았고, 중원 압박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고 우리가 주도하는 경기. 파울루 벤투 감독이 그토록 강조한 한국식 '빌드업 축구'(능동적 축구)의 성공적 안착이었다.

우루과이와의 첫 경기는 득점 없이 무승부로 끝났지만, 팬들은 "한국 축구의 희망을 봤다", "우리가 보고 싶었던 경기력"이라고 열광했다. 승패를 떠나 한국 축구도 꾸준히 노력하면, 세계적 강팀과 당당히 맞설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건 더 벅찬 기쁨이었다.

투지도 돋보였다. 조별리그 두번째 경기. 가나전에서 두 골을 먼저 내줬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 붙어 두 골을 만회했다. 추가 실점으로 석패했지만, "너무 잘 싸워줘서 고마웠던 경기"였다. 그 열렬한 응원과 믿음에 화답한 건 선수들이었다.

조별리그 3차전에서 16강 진출 가능성 9%라는 숫자를 100%로 바꿔 놓기까지 몸이 부서져라 뛰고 또 뛰었다. 우승후보 포르투갈을 극적으로 누르고 16강행 티켓을 거머쥔 건 기적이 아닌 실력이었다.

태극전사들이 쌓아올린 '우리의 축구'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했기에 만들어진 성과다. 지난 4년 4개월 동안 벤투호는 칭찬보다는 비난에 익숙했다. 경기력이 들쭉날쭉할 때마다 '빌드업 축구'에 대한 불신이 넘쳐났고, 감독 경질 요구까지 나왔었다.

그럼에도 벤투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와 목표에만 매몰되기보다는, 묵묵히 자신들의 길을 갔다. 결과가 아닌 과정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패배하지 않는 팀이 좋은 팀은 아니다. 세계에 패배를 하지 않는 팀은 없다. 최종적인 목표를 앞두고 지지 않는 것이 좋은 팀이 가진 차이점이다. 우리는 지금 한 번 넘어졌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어떤 역량으로 다시 일어나느냐다."
파울루 벤투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카타르 월드컵을 향한 한국 축구 대표팀의 여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국대:로드 투 카타르'에서 벤투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지난 6월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대패한 뒤였다. 승패에 연연하기보다 '우리의 축구'를 이어가고자 하는 뚝심이었다.

언더도그의 승리...'꺾이지 않겠다' MZ세대의 반란과 저항의 구호

②언더도그(약자)의 반란.

'어차피 끝났다'는 냉소를 물리치고, 세계적 강팀에도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우리의 축구'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16강이었다. 어느 세대보다 수많은 포기를 강요받아온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는 '포기하지 않고, 버텼을 때, 비로소 자신들이 추구하던 가치를 지킬 수 있다'는 데 공감했다. 그 울림이 압축된 한마디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중꺾마'는 이른바 롤드컵으로 알려진 게임대회(리그오브레전드 월드챔피언십)에서 프로게이머로선 노장인 김혁규가 약체팀을 이끌고 세계 최강팀을 무너뜨리며 밝힌 우승 소감에서 유래됐다. 1차전에서 패배한 김혁규는 "지긴 했지만, 저희끼리만 안 무너지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의지를 다졌고, 끝내 이겼다. 7번의 도전 끝에 이뤄낸 언더도그의 승리였다.

2022년의 '중꺾마'는 2002년의 '꿈은 이루어진다'와 결이 좀 다르다. 둘 다 '포기하지마'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중꺾마는 지더라도 내 길을 꿋꿋이 걸어가겠다는 것. 즉, 물러섬 없는 과정에 대한 의지의 표명이다. 반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성취 지향적 소망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청년세대의 저항의 외침으로 보는 분석도 있다. 사회가 강요하는 획일화된 평가 기준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자, 저마다의 다양한 '꺾이지 않음'을 선보이겠다는 포부라는 것.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지난 6일 '승률 9% '알빠임?'… 월드컵이 Z세대 정신 바꿨다'는 제목의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정형화된 데이터로 축소할 수 없는 나, 즉 개인의 잠재성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영건들이 있어 4년 뒤가 더 설렌다... 이제부터 진짜 축구를 좋아할지도

③희망의 끝은 절망 아닌 더 큰 희망.

이번 월드컵의 또 다른 수확은 20대 초중반 영건들의 '재발견'이다. 공격 자원부터 든든하다. 16강까지 4경기 동안 20대 초중반 영건들이 4골(전체 5골)을 합작했다. 가나전에서 헤더로 두 골을 넣은 조규성(24), 포르투갈전 역전 결승골을 터뜨린 황희찬(26), 브라질전 '대포알슛'의 백승호(25). 이들은 모두 4년 뒤 월드컵에서 한국을 이끌 핵심선수들이다.

'게임체인저'로 등극한 대표팀 막내 이강인(21)의 무궁무진한 성장도 기대된다. 월드컵 전만 해도 벤투 감독의 외면으로 벤치 신세였던 이강인은 이제 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됐다. 가나와 2차전에서는 교체 투입 1분 만에 조규성의 골을 돕는 환상적인 '택배 크로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거리(45.04㎞)를 뛰고 가장 많은 패스(243회)를 한 황인범(26)도 4년 뒤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더 기대되는 선수다. 대표팀 '수비의 핵' 김민재도 아직 스물여섯이다. 한국 축구 간판 손흥민(30)도 '마지막 월드컵'을 고하지 않은 만큼, 다음 월드컵에도 출전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기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이기려면 축구를 좋아하고 즐겨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축구를 잘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앞뒤가 바뀌어 있다.
이영표 KBS 해설위원, 2018 러시아 월드컵 앞두고

4년 전 러시아 월드컵을 앞두고 나온 이영표의 일갈은 이제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2022 카타르 월드컵을 달군 태극전사들의 투혼 덕분에, 우리도 축구 그 자체를 좋아하고 즐길 수 있게 됐는지 모른다.

강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