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스무 살이 되어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심지어 농구도 검은 양복을 입고 하는 경건한(?) 학우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앞으로 내가 있을 곳은 이렇게나 세속과는 별개의 거룩한 곳이구나' 생각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다음 해 나는 학교를 그만두려 했다. 신학교나 교단, 교회에는 하얀 천사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시커먼 마귀들만 본 듯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도 성직자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마귀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학문을 해보라는 권유에 다행히 나는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소명을 지킬 수 있었다.
내가 미리 예레미야서의 다음 구절을 잘 알았더라면, 그때 그렇게나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박살 내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너희가 그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예레미야 5:1). 이 예언 그대로 보자면 예루살렘에는 '단 한 명도' 진실한 자가 없었다. 그리고 기원전 6세기 초반, 정말로 예루살렘은 박살이 나버렸다. 단 한 명도 올바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학교를 졸업한 지 삼십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신학교나 교회에서 별일을 많이 보지만 그리 놀라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어릴 적과는 다르다. 그래서 다행히 실망이 적다. 신앙인으로서 중요한 건 그들이 아니라 나다. 내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 지경의 인간을 어떻게 고칠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주었다.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미야 31:33). 단 한 명의 의인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갈아엎고 채우시겠다는 것이다. 거의 인공지능(AI) 신앙인을 만드시겠다는 취지처럼 들린다.
후에 기독교는 예수가 구세주이심을 믿는 마음을 이 구절이 상징하는 것으로도 해석한다. 그래서 지금 교회와 신학교에 있는 자들의 마음은 멸망한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과는 다르게 진실할까? 21세기에 예레미야가 다시 나타나 둘러보고 찾아보아도 장담컨대 단 한 명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진즉 박살 났어야 할 교회고 신학교지만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것일 뿐.
인간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자는 말은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남도 나도 모두 하늘의 은총이 아니었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겸허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며, 예수의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자는 것이다. 교회 밖이나 안이나 사람은 서로가 높낮이를 따질 수 없는 동지들이다.
인간이 이렇게 그저 그렇다. 이때 성서의 지혜 문헌은 매우 현실적인 조언을 준다. 어차피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대신 지나치게 욕심부리지만 말아 달라고 경고한다. 욕심부려도 된다. 다만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이 나쁠까? 다만 "속히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벌을 면하지 못한다."(잠언 28:20). 지나친 욕심에 빨리 부자가 되려 하면 분명 상식과 절차를 쉽게 어길 것이기 때문이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저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아서 그 성공이 늘 불안할 것이다.
성공만 바라면 "죄악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28:22). 뻔한 사실이지만 요란 법석한 공동체에는 분명 욕심이 지나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자가 있을 것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주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풍성함을 누린다."(28:25). 지나치지 말자. "식욕이 마구 동하거든, 목에 칼을 대고서라도 억제하여라."(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