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 모듈 밑에서 자란 싱싱한 배추... 기후위기·식량난 두 마리 토끼 잡는다

입력
2022.12.02 04:30
8면
태양광 모듈 4m 높이로 설치
햇빛·빗물 ·비료 조절 새 농법
속이 꽉 찬 맛 좋은 배추 수확
모듈 25년 사용 가능한데도
법 제한으로 8년 후 철거 위기

캠퍼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파릇파릇한 배추와 쪽파가 눈을 사로잡았다. 지난 달 22일 경북 경산시 영남대학교 서쪽 밭에서는 김장철을 앞두고 배추수확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밭고랑을 따라 설치된 태양광 모듈만 빼면 여느 농가와 다를 바 없었다.

영남대 연구진 김욱경(47) 농업감독이 밭에 난 배추를 잘라 “먹어보라”고 권했다. 잘 익은 노란 속 부분이 아삭하게 씹히고, 맛이 좋았다. 반으로 가른 배추 속은 빈틈없이 꽉 찼다. 올해 농사가 잘됐다는 증거다.

기자가 찾아간 밭의 정확한 명칭은 ‘메가와트(MW)급 태양광 발전 R&BD(사업화연계기술개발) 실증센터’다. 신재생에너지 국제인증제도(IECRE) 기준에 따라, 각국에서 이런 센터들이 운영되고 있다. 태양광 시스템 인프라의 성능과 신뢰성을 검증하는데, 국내 태양광 기업이 해외에 발전소를 짓기 위해서는 센터의 평가를 통해 데이터를 확보하고 제출해야 한다.


영남대는 2020년부터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이곳에선 배추 1,700포기와 약 1톤의 쪽파를 기르는 밭 위에서 태양광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각지의 센터가 사막이나 온난 기후 등 다양한 환경에서의 성능 측정을 하고 있지만 이 중 영농형태양광 연구는 영남대가 유일하다.

영농형태양광은 기후위기와 식량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기존의 농촌 태양광은 논밭을 바짝 덮어 생명력을 빼앗았다. 땅 주인은 물론 임차농도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농가의 반대가 거셌다. 반면 영농형태양광은 에너지와 농작물 두 가지를 동시에 생산할 수 있다. 태양광 모듈을 약 4m 높이로 설치해 충분한 공간을 만든 덕분이다.

다만 모듈이 하늘을 일부 가리다 보니 농업 효율이 낮아질 우려도 있다. 센터에서는 작물에 햇빛이 골고루 닿을 수 있는 설계를 연구하는 동시에 맞춤형 농법도 개발 중이다. 달라진 환경에 맞춰 방법만 조금 바꿔주면 기존 농사와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배추를 예로 들어보자. 김 농업감독은 “영농형태양광 밭에서 자란 배추보다 기존 밭의 배추가 비료를 더 많이 먹는다”고 말했다. 배추도 햇빛을 많이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 양분을 많이 흡수한다. 마치 스트레스를 받은 직장인들이 간식과 야식을 찾는 느낌이랄까. 반면 영농형태양광 배추는 상대적으로 기존 배추보다 무르게 자란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해 비료를 덜 주되,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규산질 비료를 섞는 게 좋다는 설명이다.

특히 농민들 사이에 ‘영농형태양광 농사는 병충해가 많다’는 오해가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 농업감독은 “작물에 병이 생기는 건 물이 튀면서 땅에 있던 병원균이 닿기 때문인데, 태양광 모듈이 빗물을 막아서 이를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배추 잎마름병·무름병이 유행해 피해가 많았는데 센터의 배추는 무사했다고 한다. 모듈에 빗물받이를 설치해 물을 저장한 뒤 재활용한다.

‘모듈 구조물에서 환경호르몬이 나온다’는 일각의 주장도 설치 방식만 잘 지키면 문제가 안 된다는 설명이다. 정재학 영남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논밭에 직접 콘크리트 타설을 해서 굳히는 대신, 외부에서 만들어와서 기초를 다지면 문제가 없다”며 “콘크리트 대신 스크루를 박아 모듈을 세우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영농형태양광이 농가 소득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겨울 등 농사를 짓지 않는 시기에도 전력판매로 수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 65곳에서 영농형태양광을 운영 중이다. 하지만 농업인이 직접 운영하는 곳은 단 두 곳뿐. 모두 연구기관이나 발전기업이 협력한 시범사업이다.

설비비용은 일반 태양광보다 1.5배 이상 비싼데 제도적 한계로 투자비용 회수가 어렵기 때문이다. 현행 농지법 시행령상 농지를 다른 용도로 일시 사용할 수 있는 최장 기간은 8년이다. 태양광 모듈의 수명이 25년을 넘지만 그보다 훨씬 빨리 철거해야 하는 현실이다. 지난해 국회에 영동형 태양광의 경우, 농지 일시사용 기간을 23년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영농형태양광 발전사업 지원법’이 발의됐지만 아직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정재학 교수는 “영농형태양광에 드는 투자비를 일반 태양광 대비 120%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며 “규제가 완화돼 연구개발이 활성화된다면 에너지 전환을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산= 신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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