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성소수자·낙선자… 데이비드 김의 도전과 슬픔

입력
2022.12.0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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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연방 하원의원 출마, 아깝게 낙선
'기업 정치 후원금 금지' 공약 등 변화 지향
"소수자 위한 정치인 되고자 다시 나갈 것,
나를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 문자에 슬펐다"

미국 사회 속 동양인, 보수적인 목사 아버지를 둔 진보적인 성소수자. 데이비드 김(38·한국명 김영호)은 '소수자 중의 소수자'이다.

변호사인 그는 올해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 후보로 캘리포니아 34지구에 출마, 48.7%(99% 개표 기준)의 표를 얻었다. 한국계 5명 중 4명이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는데, 그의 이름만 없다.

하지만 같은 당 경쟁자였던 현역 의원보다 2.6%포인트 뒤졌을 뿐이다. 2020년 선거에서 6%포인트 뒤졌던 것보다 크게 도약했다.

소수자의 정체성을 품고 도전한 그는 이 선거의 주인공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소수자의 소리를 더 듣고 그들의 권리를 찾고자 한다"는 김씨는 기업에 휘둘리기 싫어 기업 후원금도 받지 않았다. 그의 후원금은 19만 달러(약 2억5,000만 원) 남짓이었고, 상대 후보는 157만 달러(약 21억 원)였다.

그의 분투기는 2020년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나선 5인의 한국계 미국인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초선'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름처럼 '다윗(데이비드)'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을 찾은 김씨를 지난 11월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92년 LA폭동이 '정치인' 데이비드 만들어"

_2020년에 이어 같은 지역구에서 두 번째 선거를 치렀다. 소감은 어떤가.

"지난 선거에서는 상대 후보였던 현역 의원이 내 이름을 아예 입에 담지조차 않았다. 그러다 막상 내 지지율이 47%로 나오자 이번엔 흑색선전이 거셌다. 부모님을 따라 18세 때 공화당에 유권자 등록을 했던 점을 들고 나와 '트럼프 지지자'로 몰거나, '세금을 많이 물릴 거다' '아시아인을 뽑지 말라'고 비방하는 식이었다. 이런 내용이 담긴 가짜 웹사이트가 만들어지고 민주당 유명 정치인들이 상대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등 엄청나게 힘든 선거였다."

_캘리포니아 34지구에는 로스앤젤레스(LA) 한인타운이 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이 출마에 영향을 미쳤나.

"돌아보면 항상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진로를 선택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학생 대표 선거에 나가기 시작한 계기도 1992년 LA폭동이었다. '미국인들이 왜 한인타운을 불태울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한인은커녕 동양인도 드문 학교에 이런 아픔을 알리고 싶었다. 변호사가 됐을 때는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케이팝이 미국으로 넘어올 때 준비된 한국 변호사가 필요하기에 연예 분야를 전문으로 하면서 JYP 뉴욕 사무실에서 인턴을 하기도 했다."

_정치를 선택한 이유는.

"검찰청과 유명 영화사의 고문 변호사를 거쳤다. 또 이민 소송 변호사, 소년법 담당 국선 변호사로 일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이들을 도울 수 있겠지만, 이대로는 100년 후 후손들의 삶도 지금과 다르지 않으리라 느꼈다. 2018년에 해당 지역구의 녹색당 후보 캠프서 봉사했는데, 미국 정부의 시스템이 주민을 위하지 않는다고 실감했다. 정치인들은 한 번에 이 모든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데 왜 하지 않을까.

한인 사회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은 선거철에만 한인 커뮤니티를 위하겠다 하다가 당선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이래선 안 된다'라고 생각했다."

보수적 한인 사회, 성 정체성 포용해줘

_'기업의 정치 후원금 금지'를 공약하고, 기업 후원금을 거부했다는데.

"기업의 자금에 기대 당선된 정치인들이 주민의 요구를 무시하는 일은 당연하기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다. 생각 이상으로 한인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 홍보 전단지 보낼 돈이 없었는데 한인 어르신들 50여 명이 찾아오셔서 접어주신 봉투에 이를 담아 보내기도 했다."

_영화(초선)에는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보수적인 한인 사회에서 지지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모습도 나온다.

"2020년에 한인 사회에서 나를 뽑지 않은 이유는 성소수자라는 점보다는 너무 나이가 어리고 한인 사회를 위해 일한 적이 없다고 여겨서였다. 나를 제대로 몰랐고 성 정체성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초선'이 미국에서 2020년에 개봉하면서 처음엔 주변 사람들이 많이 놀랐다. 그렇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며 '우리가 알던 데이비드와 같은 사람인데 한 가지 사실(성 정체성)을 가지고 다르게 대하면 안 된다'면서 한인 사회의 리더분들이 계속 지지해주셨다."


_미국에서 소수 인종으로서 정치를 한다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 한국에서는 필리핀계 한국인인 이자스민 전 의원이 인종을 이유로 무분별한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시안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5~7%다. 그렇다면 하원의원 435명 중 22명 이상이 아시안이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미국에서도 소수 인종이 정치를 한다는 일은 힘들다. 오히려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기존 그룹에서 꺼리기도 한다. 한국은 특히 단일민족의 역사가 길어 다른 인종의 정치인이 탄생하기 어렵다."

_소수자가 오히려 같은 소수자의 정치 도전을 반기지 않는 현상도 있는데.

"미국 정부의 경우 소수자를 대표한다고 정계에 진출해서 실제로 어렵고 가난한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거 때 공약을 믿고 지지했다가 막상 당선이 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반복되니 이런 아픔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 또 팥빙수를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않나. 소수자들도 자신을 위해 진짜 싸워준 사람이 없었기에 본인의 대표가 정치인이 될 경우의 혜택을 전혀 모르는 게 아닐까. 당선된다면 팥빙수의 맛을 진짜 확실히 보여주고 싶다."

"어디서든 '아웃사이더'가 눈에 들어와"

_본인이 지닌 여러 소수자성이 지금의 '데이비드 김'을 만드는 데 얼마나 영향을 미쳤나.

"이민과 종교, 아시안, 그리고 성소수자 배경까지. 미국에 사는 백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고, 보수적인 목사님 아들로서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다. 또 커밍아웃을 4년 전에 한 사람이면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다. 로스쿨 졸업했을 때 미국 경제가 얼어붙어서 큰 로펌조차 문을 닫던 상황이라 무급 변호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우버(Uber) 기사로 운전했다. 이런 경험 탓에 어디를 가든지 항상 '아웃사이더', 즉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수자로서의 정체성과 경험들로 오늘의 데이비드라는 사람이 생겼고, 다른 사람들보다 소수자의 소리를 더 듣고 그들의 권리를 찾고자 한다."

_당선 가능성을 어떻게 봤나.

"지난주 개표 상황까지만 해도 당선 가능성이 높았다가 며칠 전에 따라잡혔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는데 아버지가 이런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더 이상 네가 게이라는 사실을 얘기하지 말고 영화에서도 감독한테 얘기를 해서 (관련 내용을) 다 빼라. 선거에서 지고 성소수자라니 얼마나 창피하냐. 아버지는 한국에 어떻게 가겠니.' 아버지가 결국 나를 다 받아주지 않았다는 면에서 정말 많이 힘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정말 많이 슬펐다."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오른 비행기였지만 데이비드는 모국인 한국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국내의 젊은 정치인들이나 커밍아웃 1호 연예인인 홍석천씨, 그리고 영화를 통해 그를 지지하게 된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는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선거 과정에서도 많은 이들이 힘을 줬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당신이 아시안이라, 성소수자라 힘이 된다' '성소수자 기독교인에게 희망을 줬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들이 선거가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고 덧붙였다.

데이비드는 채 묻기도 전에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다시 나갈 거예요. 똑같은 자리에 도전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또 나갈 테니 지켜봐주시길 바랍니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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