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단풍 종결자를 봤나.”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터져 나와 급히 갓길에 차를 세운다. 10km를 넘게 달리는 동안 모퉁이를 몇 번이나 넘었는데도 좀처럼 이 멋진 풍경이 끝날 것 같지 않아서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낙엽송 군락. 내가 서 있는 이곳이 2022년 11월 중순의 경북 봉화군 춘양면이라는 것도 잊은 채 그 절경 때문에 나는 유년의 추억 속으로 스르륵 빠져든다.
아무리 두 팔을 쭉 뻗어 보아도 열 살의 내 품은 그 낙엽송 한 그루를 다 안지 못했다. 나무의 둘레가 150cm는 족히 되었으니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 아빠는 가을이 오면 옆 동네로 언니와 나를 데려갔다. 은행나무처럼 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내 앞에서 떼를 지어 장관을 연출했다. 할머니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심은 나무들이 이렇게 자라 커다란 숲이 된 거라 했다. 김천 단지봉 낙엽송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낙엽송숲이라는 그곳은 지난해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었다.
차에서 내려 숲속으로 들어가 낙엽송을 안아본다. 내 품에 쏙 들어오는 걸 보니 이 친구들은 내 나이 정도 되었겠다. 소나무과에 속하는데 상록수가 아니라고 해서 낙엽송이고 우리 이름은 잎갈나무다. 해마다 잎을 간다는 뜻. 그런데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친구는 일본잎갈나무다. 진짜 잎갈나무는 따뜻한 남쪽을 피해 휴전선 너머 북녘에 주로 산다. 일본잎갈나무가 살기에는 지금의 대한민국 기후가 안성맞춤이다.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우리는 흔히 낙엽송이라 부른다.
아주 먼 과거에는 잎갈나무가 한반도의 남쪽 지방까지 번성했었다. 빙하기를 대표하는 포유류 매머드가 남한에도 살 수 있었던 때 말이다. 그로부터 수백만 년이 흐르는 동안 지구가 차츰 온기를 품기 시작했고 식물은 각자 선호하는 기후대를 찾아 아주 천천히 이주했다. 어떤 식물은 더 서늘한 곳을 찾아 북상을, 또 어떤 식물은 더 따뜻한 곳을 찾아 남하한 것이다.
일본잎갈나무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때부터 꾸준히 심어서 키우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일본이 원산지로 알려진 이 나무가 오늘날 남한 조림지의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1904년 처음 심기 시작한 낙엽송이 2018년 기준 무려 27만2,800ha(여의도 면적의 325배)의 숲이 되었다. 우리 민족과 함께 일제강점기를 통과한 나무이자 한반도의 헐벗은 민둥산을 푸르게 변모시킨 장본인이 우리 땅에 뿌리내린 낙엽송, 즉 일본잎갈나무다.
우리 국민에게 이토록 고마운 낙엽송을 베어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일기도 했다. 그 씨앗이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이유에서다. 국경이나 이념이 있기 훨씬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던 나무들을 인간의 관점에서 셈하고 나서 지금은 외래종이니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논리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게는 터무니없다.
낙엽송은 버섯도 키운다. 그들 숲에 나타나는 버섯 중에 꽃송이버섯과 큰비단그물버섯은 먹을 수 있고 맛이 좋다. 약효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자흑색불로초도 낙엽송숲에 기대어 산다. 낙엽송은 우리 일상에서 곳곳에 사용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우리 할머니는 낙엽송 송진을 연고처럼 썼고 몸에 좋다며 잎을 고아서 나를 먹였다. 실제로 현대 과학은 낙엽송의 여러 부위가 항산화 영양제처럼 쓰일 수도 있다고 평가한다. 건강하게 쭉쭉 뻗어 빨리 자라기 때문에 원목과 합판으로도 널리 이용된다. 최근 들어 나라가 나서서 우리 산에서 자란 낙엽송으로 학교 책상도 만들고 건물도 지어 국내 목재산업이 흥하는 데도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그 유명한 풍기인견을 만드는 원료가 낙엽송 목재의 섬유질이다.
숲을 빠져나와 다시 차를 몰고 모퉁이를 돈다. 내가 자란 마을에서는 모퉁이를 ‘모티’라고 했다. 그 모티길에서 잠시 숨을 돌리라는 늦가을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지난 계절들 참 쉼 없이 달려왔다고, 이제 좀 쉬어 가도 된다고,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다정하고 따뜻한 그 목소리가. 낙엽송이 깊고 간절하게 물들었으므로 우리는 겨울의 입구에 당도한 것이다.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