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마음 운동' 필독서

입력
2022.11.1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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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작 8> 정용준 ‘선릉 산책’

편집자주

※ 한국문학 첨단의 감수성에 수여해 온 한국일보문학상이 55번째 주인공을 찾습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이달 하순 발표합니다.

누구의 삶도 궁금하지 않고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정용준의 소설로 도망친다. 그곳에 가면 말 대신 말이 아닌 것들이 나를 반겨준다.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생각, 아직 문장이 되지 않은 표현, 아직 감정이 되지 못한 기분. 정용준의 소설은 아직 무엇도 되지 못한 것들을 “검지로 짚”어 주며 “여기. 좋네요” “그래도 잘 쓰셨어요” 눈 맞추고 이해해 준다. 그러고 나면 조금 커지는 것 같다. 누구도 궁금하지 않고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작아진 내 마음이.

‘선릉 산책’은 정용준이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발표한 단편소설 7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6년여에 걸친 시간이 담긴 이유는, 그가 단편을 발표하는 사이사이 중편, 경장편, 장편 등 거의 모든 형태의 소설 작업을 쉼 없이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 수록된 소설들은 그토록 다양한 형식의 소설을 쓰는 가운데 변하지 않은 정용준 소설의 내핵인 동시에 그처럼 다양한 형식을 통해 일군 넓은 스펙트럼의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릉 산책’에는 정용준의 모든 것이 다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핵심엔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있다.

‘선릉 산책’은 “우직하고 착한 캐릭터”인 ‘나’와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한두운이 함께 보내는 열두 시간의 이야기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세계 앞에서 한두운이라는 수수께끼를 경험한다. ‘두 번째 삶’에서 ‘나’는 과실치사로 10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전과자로, 10년 동안 ‘나’는 ‘나쁜 사람’인 자신과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 더 나쁜 사람에 대해 생각하길 멈추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들’에서 ‘나’는 죽음 충동에 사로잡혀 삶에 대한 의지를 놓으려 하는 엄마의 아들이다. 불안과 공포의 한가운데에서 사라지려 하는 엄마의 안간힘을 지켜본다. ‘미스터 심플’은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만난 두 사람이 글을 매개로 서로를 들여다보는 내용이다. 처지는 다르지만 모두 타인을 이해하는 시간 속에 있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에 다름없다. 소설이 쓸모 있는 것은 삶의 기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인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낯선 타인을 만나고, 다가서고, 물러나며, 재회하고, 알 것 같고, 그러다 모르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이해를 위한 마음의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사이 알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타인은 알 것 같은 마음으로서의 타인이 된다. 소설이 타인의 마음을 읽기 위한 참고서라면 ‘선릉 산책’이야말로 필독서라 부를 만하다.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