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나의 운명을 안다는 것은 축복일까. 인간의 근원적 불안이 사라진 자리는 무엇도 선택할 수 없어서 느끼는 무력감으로 채워질 테다. 아니면 반감을 품고 운명에 저항하는, 무모하나 생동하는 삶이 펼쳐질지 모른다. 2020년 12월부터 카카오웹툰에서 연재된 일링스의 '수린당'은 후자를 선택한 자들의 이야기다. 도교의 신과 한국 민속신앙을 모티브로 만든 픽션으로,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재미가 쏠쏠하다.
주인공 '은침·홍실' 자매는 봉황의 축복을 받은 가문의 자손이다. 운명은 옛날옛적에 부모 없이 삯바느질을 하며 어렵게 살던 자매가 우연히 주운 용의 비늘을 제 주인(봉)에게 찾아주면서 시작됐다. 비늘을 잃고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준 자매에게 봉은 축복을 내린다. 언니는 평생 마르지 않는 재능(바느질)으로 수린당을 세워 선계의 옷을 수선하고, 동생은 역사에 길이 남는 성군을 낳는 운명을 선물받는다.
문제는 이 축복이 대대로 이어지면서 벌어졌다. 장녀는 가업을 잇기 위해 사랑하는 이도 자식도 없이 살고, 차녀는 수린당의 후계자와 성군을 낳기 위해 오직 어머니로서의 삶만 살아야 했던 것. 웹툰 '수린당'은 장녀 '은침'과 차녀 '홍실'이 저주가 된 이 축복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정을 그렸다.
가장 큰 매력은 도교와 민속 설화를 적절히 차용한 점이다. 캐릭터가 된 설화 속 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하늘을 다스리는 신인 '옥황상제'나 청실과 홍실을 서로 엮어 인연을 만든다고 알려진 '월하노인', 아이를 점지해주는 '삼신할매' 등이 때론 코믹하게 때론 신묘하게 표현된다. 특히 인간으로 태어나 내면의 욕망을 버리고 수행한 끝에 선계 최고의 신이 된 '옥황상제'처럼, 전통적 캐릭터의 변주가 흥미롭다. '봉황이 울면 어진 임금이 태어나 태평성대가 된다'는 식의 설정들도 익숙해 반갑다.
동양 설화를 기반으로 한 웹툰의 성공은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이승과 저승을 새롭게 풀어낸 주호민의 '신과 함께'는 웹툰 자체로는 물론이고,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1, 2편 모두 '천만 영화'가 됐다. 설화를 재해석한 김나임의 '바리공주', 배혜수의 '쌍갑포차' 등도 대표 인기작이다. 익숙한 설정 덕에 개연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동시에 옛 이야기를 비트는 반전의 재미를 선사한다는 게 이들 작품의 강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가혹한 운명에 저항하는 자매의 여정은 일종의 영웅서사 혹은 모험서사로 매력적이다. 비늘이 떨어진 '봉'을 만난 '은침·홍실' 자매는 비늘을 수선해 주고 그 대가로 '축복을 거둬달라'는 소원을 빌자는 계획을 세운다. 비늘을 새로 만들기 위해 자매는 흐르는 불빛, 숨어 있는 물, 따뜻한 쇠 등 신선들이 직접 관리하는 온갖 재료들을 구하러 떠나면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다.
운명을 거스르는 자들은 또 있다. 축복을 내렸던 주체인 봉황마저도 자신의 선조로부터 계속된 운명을 거부한다.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봉'과 '황'은 서로 쌍을 이루어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삶을 거부하고 선계에서 도망친다. 여기에 '옥황상제'의 분신인 '옥천야'와 '현천상제' 역시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려 한다. 여러 인물들의 선택이 겹겹이 쌓여 거대한 흐름을 흔드는 서사는 독자에게 삶과 선택, 운명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동양 판타지물의 매력을 높이는 작화도 빠질 수 없다. 무엇보다 로맨스 만화 속 캐릭터와 같이 묘사된 인물들은 설렘과 불안의 감정을 세심하게 전달한다. 선계의 몽환적인 느낌을 잘 살린 그림과 동양 설화 속에 나올 법한 건물, 정원, 영수 등을 꼼꼼하게 새긴 장면들은 한 컷도 허투루 넘기지 못하게 한다. 바느질을 소재로 삼은만큼, 동양적인 미를 보여주는 화려한 의상들을 보는 맛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