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세상을 움직이는지 묻는다면 각자 자신만의 대답이 있을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도덕은 그만큼 힘이 센 단어여서 무엇을 가져다놓아도 번듯하고 제값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주혜의 소설은 바로 이 자리에 돌봄노동, 늙고 병들어가는 몸, 여성들 간의 만남과 연대를 가져다놓는다.
“내게 닿은 최초의 이야기들은 늙은 여자들에게서 왔다. (…) 그 늙은 여자들 자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을 때 그들은 이미 내 곁에 없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서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작가의 말, 300-301쪽)는 말은 이주혜 소설의 출발 지점을 알려주는 말로 손색이 없다.
특별한 것은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이 자기 몸의 노화를 발견하면서 완전한 것처럼 보였던 실상 뒤에 감춰진 이면과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기억 여행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물속을 걷는 사람들'에 등장하는 90년대 초의 대학가, 시위, 페퍼 포그(최루 가스), 운동권 선배와의 사랑과 임신이라는 서사 뒤에 감춰진 것은 실은 동성 친구에 대한 지극한 사랑,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인식 뒤에 감춰진 웃지 못할 요실금의 역사이다. 이주혜는 이 대비를 섬세한 구성과 성실한 재현으로 교차편집하여 보여주면서 대문자 역사의 환상을 설득력 있게 교정한다.
하지만 이주혜 소설은 그런 순간에조차 인간의 복잡 미묘함을 보여주는 데에 탁월하다. 모녀 관계를 비롯하여 여성들 간의 연대 혹은 자매애를 그릴 때에도 인물들은 미움과 애정, 이해와 오해 사이를 왕복한다. '오늘의 할 일'에서는 ‘춘하추동’ 네 계절의 아이를 갖고 싶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한 자리를 배다른 남동생으로 채워 데리고 나타났을 때, 세 명의 여성이 어떻게 그 아이를 원망하고 지워낼 수밖에 없었는지를 낭만적 봉합 없이 냉정할 정도로 가슴 아프게 그려낸다. 그럼에도 끝내 공감과 연민의 작은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아버지의 사십구재가 끝난 후 세 자매가 울며 개천의 잉어를 구해내고 결국 마지막 남은 할 일로 떠올리는 것이 바로 요양병원에 있는 어머니를 보러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주혜 소설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누군가를 보살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관계의 지난함과 입체성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유효함을 믿으며 인간의 품격과 소설의 품위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