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는 안전사고 발생 경위, 구조 및 수습 과정 등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4ㆍ16재단이 지난해 4월 내놓은 ‘피해자 권리 매뉴얼’의 한 대목이다. 이 매뉴얼은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 증언을 기록해 온 인권활동가 7명이 직접 작성했다. 국가가 유족 등 재난 피해자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것들을 ‘지원’이 아닌 ‘권리’로 못 박은 첫 가이드라인으로 꼽힌다.
지난달 29일 ‘이태원 핼러윈 참사’ 후 피해자들의 권리는 제대로 보호를 받았을까. 정답은 ‘아니오’다. 국가는 여전히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데 그쳤다. 가족 시신을 찾고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과정이 피해자의 몫이었다. 정부가 참사 대신 ‘사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로 부르며 뒷수습에 골몰한 것도 피해자 권리가 뒤로 밀려난 하나의 징표다.
혼란은 참사 당일부터 시작됐다. 사고 소식을 접한 유족들은 다음날 새벽까지 가족의 시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현장에 있던 희생자 45명의 시신이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에 안치됐다가, 다시 수도권 각 병원 20여 곳으로 옮겨지는 등 혼선은 계속됐다.
가까스로 시신을 찾아도 장례 준비 과정에서 또 애를 태워야 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 아들(30)의 시신을 두고 대기하던 어머니 김호경(57)씨는 “검안서가 없어 몇 시간째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튿날 서울 송파구 경찰병원에서 만난 희생자 최모(32)씨 아버지 역시 “갑작스럽게 딸을 잃어 제정신이 아닌데, 장례식장에 아이 시신을 둘 빈자리가 있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태원 참사처럼 한꺼번에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면 피해자들이 연대해 공동으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뉴얼도 이를 국가의 책무로 적시했다. 매뉴얼 집필에 참여한 김혜진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는 8일 “피해자 모임이 생기면 함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정확한 정보를 집단적으로 공유하면서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대화하는 창구가 마련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번 참사에서는 전국 각지로 흩어진 피해자가 모일 만한 공간이나 소통 통로가 마땅치 않았다. 실종자 접수처로 운영된 한남동 주민센터에서만 일부 피해자와 유족들이 잠깐 마주쳤을 뿐이다. 피해자 전담 공무원도 지방자치단체 단위로 꾸려져 조력의 일관성이 떨어졌다. 희생자 서모(20)씨 어머니는 통화에서 “주변 도움을 받아가며 장례를 겨우 마친 뒤 ‘지원금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직접 구청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매뉴얼 제작 주체가 민간 재단이라는 점도 피해자 권리가 제대로 보호되지 않은 한계로 지목된다. 매뉴얼을 재난안전기본법에 담거나 정부 부처와 연계하는 형태로 이행 강제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구청 등의 책임 소재를 명시해 누가 담당자고, 담당 기관과 부서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도 “재난안전기본법에 피해자 권리와 관련된 원칙론만 몇 조문 넣고, 세부 내용은 지침 형태로 만들어 집행해도 상황은 훨씬 개선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