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핼러윈 참사를 두고 서울 용산구청과 경찰 등에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법원이 과거 판단 기준으로 제시했던 지자체와 경찰의 ‘합리적 안전 조치’가 이목을 끌고 있다. 합리적 안전 조치 이행 여부가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6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법원은 인파가 몰리거나 각종 축제와 행사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우 ‘전례’와 ‘상식상(조리상) 의무’를 책임 소재와 유무를 따지는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이태원 참사처럼 명확한 주최자가 없어 책임 소재를 따지기가 모호한 사건에선 더욱 상식상 의무를 강조했다.
2019년 북한산 수문을 여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근 하천의 물놀이 사고가 대표적 사례다. 관리 지자체인 서울시와 강북구청은 사고가 발생한 하천이 지자체가 관리해야 할 장소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해당 지역은 지자체가 안전요원 배치와 위험 사전 공지 조치를 했어야 할 물놀이 시설”이라고 못 박았다. 사고가 발생한 하천을 ‘물놀이 시설’로 지칭한 공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지자체가 관할 지역의 다른 물놀이 시설에 적용해온 사고 예방 및 사고 후 조치가 해당 장소에서도 적용됐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법원은 1988년 한 국립대 총학생회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하기로 한 학생들이 숨진 사고를 두고도 학교 측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학 측이 평소에 학생들에게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학교와 지도교수가 안전상황을 철저하게 점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 책임이 있다고 봤다.
법원은 2005년 청계천 복원을 기념하는 새물맞이 축제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와 관련해서도 유사한 취지로 판결했다. 사망 피해자가 무단횡단을 했다는 점에서, 지자체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재판부는 "인파가 몰리면 사람이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할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관행상 마땅히 해야 했을 ‘상식적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 이를 합리적인 안전 조치가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고 발생 후 정부와 지자체 대응도 합리적 안전 조치 준수 여부를 따지는 근거가 됐다. 법원은 2020년 어린이공원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와 관련해 지자체가 재판부가 요구한 시설 검사 자료를 숨기거나 제때 제출하지 않아 유족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고, 상식적으로 져야 할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며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정부와 지자체는 주최자가 없어 관련 매뉴얼이 없다고 했지만, 용산경찰서와 용산구에서 ‘핼러윈 데이 종합치안대책’ 등 인파 통제를 위한 안전 지침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계 관계자는 “인파 통제를 위해 마련한 안전 지침을 상식과 전례에 맞게 적용하지 않았다면 법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