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트라우마' 빠진 대한민국..."치유는 침묵 아닌, 소통과 공동체 연대로"

입력
2022.11.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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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목격자만 수만명...집단 트라우마 주의보
영상 공유·반복 시청...간접 경험으로도 '외상'
"애도는 물 흐르듯 해야 회복에 도움"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3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초유의 압사 사고를 접한 국민들 사이에서 심리적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사고를 직접 목격한 이들뿐 아니라 그저 미디어를 통해 간접 경험한 일반 시민들 중에도 우울감과 무력감, 답답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이른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전조 증상들이다. 전문가들은 전례 없는 집단 트라우마 조짐이 있는 만큼 유가족, 부상자뿐 아니라 현장 목격자를 포함한 정신 취약 집단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정신건강 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대규모 정신 외상자 발생... 집단 트라우마 '경고음'

의료계에선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번 참사에서 대규모의 재난 경험자가 발생한 만큼 향후 정신적 후유증이 상당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에 따르면 심각한 사상자가 나온 재난을 겪은 사람은 공포, 불안, 위장장애, 호흡곤란 등 트라우마 반응을 겪을 수 있다. 양상은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1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PTSD라는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6명의 유가족, 부상자, 구조 참여자, 현장 목격자 등을 토대로 추산한 바에 따르면 이번 사고를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사람만 최소 1,000여 명에서 최대 1만여 명 수준이다. 참사 당일 약 13만 명이 이태원에 몰렸고, 이들 상당수가 참상을 바로 앞에서 혹은 인근에서 겪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거 대형 참사와 비교해도 전례 없는 규모의 집단적 외상이 발생한 것으로 의료계는 보고 있다. 그중 일부가 찍은 영상과 사진이 온라인에 급속하게 퍼져나가면서 현장에 없었던 불특정 다수 시민들도 수십 명이 동시에 심폐소생술(CPR)을 받는 모습, 좁은 골목길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모습 등 현장의 참상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모자이크 없는 사고 영상과 이미지를 반복해서 접한 시민 가운데 심리적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취업준비생 이모(28)씨는 "사고 직후부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과 영상을 모두 찾아봤다"며 "아직까지도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데 그 장면이 떠오르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직장인 문모(42)씨도 "출근길 붐비는 지하철에서 문득 이태원 압사 사고가 생각나 숨이 조여오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며 "모자이크 처리된 영상을 봐도 어떤 장면인지 알아서 볼 때마다 숨 쉬기가 힘들고 손발이 떨린다"고 토로했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 학회장인 백종우 경희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PTSD 진단은 재난 발생 한 달 이후 이뤄지는데 전통적으로 '직접 경험'이 첫 번째 전제 조건이지만 이태원 사고는 다수 시민들이 고화질의 현장 영상과 이미지에 수시로 노출되면서 직접 경험에 준할 정도의 충격을 겪은 것으로 보고 있다"며 "외상 집단의 규모가 크고 스트레스 정도가 심해 이들의 정신건강을 위한 예방적 조치가 시급한 상황이지만 현재는 목격자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어 선제적 조치를 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눈 감아도 떠올라" 불안감 호소...PTSD 예방하려면

한국임상심리학회에 따르면 대규모의 사회 재난을 겪은 후에는 누구에게나 일정 기간 심리적·신체적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재난 직후 당시의 기억이나 이미지가 수시로 떠오르고 꿈으로 반복적으로 겪을 수 있고, 자율신경계가 과각성돼 쉽게 놀라거나 짜증이 늘어날 수 있다. 참사 당시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괴로운 기억을 잊고 관련 생각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감정적 반응이 무뎌질 수 있다.

가장 흔한 증세는 불안감과 우울함이지만 공포, 절망감, 죄책감 등이 동시에 올라오기도 한다. 정서적 충격이 심할 경우 가슴이 답답하거나 잠을 못 이루고, 식욕이 떨어지거나 소화가 잘 안 되는 등의 신체 반응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반응은 보통 시간이 지나며 호전되지만 방치했을 때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뿐 아니라 PTSD와 같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PTSD는 다수 사상자가 발생한 사회재난이나 자연재해, 전쟁, 성폭력 등으로 극심한 공포감을 경험하고 난 뒤에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는 질환이다. 재난 직후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한 달 후나 심지어 몇십 년 후에도 증세가 나타나기도 해 초기 관리가 중요하다.

이정석 일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유가족과 현장에 있던 생존자, 목격자 외에도 미디어를 통해 간접 경험한 후 심한 트라우마 반응을 겪고 있는 시민, 과거 압사 사고를 경험했던 유경험자, 우울증이나 PTSD 등 병력이 있는 환자들은 정신건강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며 "주변에서도 관심을 쏟아야 하지만 스스로 안정을 취하면서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고 식사, 목욕 등 일상생활이 문제가 될 정도라면 되도록 빨리 상담이나 진료 같은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트라우마 치유는 어떻게... '속도', '소통'이 중요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참사 이후 트라우마 반응이 지속될 경우 우선 이를 악화시키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피하고 혼자서 지내려는 행동은 스트레스 반응을 더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을 만나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소통을 하라고 조언한다.

불안 정도가 심한 경우 사고 관련 정보나 뉴스 등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사고 관련 장소나 정보, 애도 행위 등을 무조건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EMDR트라우마센터장을 맡고 있는 김남희 하늘마음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사람마다 자극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개인의 속도에 맞춰 대응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사회 재난 이후 슬픔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동체 연대이기 때문에 관련 활동에 참여하거나 정보를 접하는 것을 권장하고, 애도 반응 역시 인위적으로 막지 않고 물이 흘러가듯 두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실생활에서 쉽게 응용할 수 있는 '그라운딩(grounding·안정화)' 기법을 활용하는 것도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는 방법이다. 김 원장에 따르면 그라운딩 기법은 극심한 스트레스나 충격, 불안 등 감정에 압도되지 않고, 지금 머무는 장소에서 감각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심호흡과 복식호흡을 크게 하고,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바닥을 느끼는 '착지법', 팔을 가슴 위에서 교차시켜 양측 팔뚝을 수차례 두드리는 '나비 포옹법', 주변 공간 중 좋아하는 색을 찾아서 응시하는 '시각요법' 등을 시도해볼 수 있다.

보건복지부는 이번 참사로 심리적 도움이 필요한 일반 시민 등을 위해 위기상담전화(1577-0199)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1일부터는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과 중구 서울광장에 차려진 합동분향소에 트라우마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심리상담 부스와 마음안심버스가 배치됐다.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후 심리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위기상담전화(1577-0199)에서 상담을 받을 수 있다.

손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