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햇살이 내리쬐나 광포하진 않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전원마을 알카라스는 평화라는 수식이 제격이다. 마을 한편에 3대째 뿌리내리고 있는 솔레 가족은 주변 풍경에 스며들어 산다. 복숭아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며 행복한 삶을 살던 이들에게 어느 날 불행이 덮친다.
가장 로헬리오(요셉 아바드)는 스페인 내전 기간 중 땅 주인 피뇰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땅을 받는다. 계약서를 쓰지 않은 거래였다. 수십 년 복숭아 농사를 지었으나 땅에 대한 법적 권리는 없다. 피뇰의 아들이 땅 소유권을 행사하려 한다. 여름이 끝날 때까지 땅을 내놓으라고 솔레 가족에 통보한다. 예외 조건은 하나 있다. 복숭아나무를 다 베어내고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면 머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3대째 일궈온 터전에서 가족의 삶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로헬리오의 중년 두 아들은 가족의 미래를 두고 대립한다. 맏아들 키메트(조르디 프홀 돌체트)는 저항을 택한다. 대안이 딱히 없으면서도 복숭아 농사에 전념한다. 둘째 아들 나티(몽세 오로)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한다. 키메트와 나티가 서로 맞서며 집안은 두 동강이 난다. 복숭아는 익어가고 가족의 행복은 조금씩 사위어간다.
극적인 갈등이 심겨져 있으나 영화가 빚어내는 감정의 진폭은 크지 않다. 전원마을에서 묵묵히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솔레 가족의 모습이 상영시간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은 가족과 가끔 화를 내고 말다툼하지만 종종 음식을 함께 먹고 술을 마시며 떠들고 웃는다. 가족은 눈앞의 위기에 한숨을 쉬면서도 오늘이라는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터널 같은 현실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등장하기도 한다. 키메트는 동료 농부들과 트랙터에 복숭아를 가득 싣고 대형 마트를 찾아간다. 복숭아를 바닥에 뿌려 으깨거나 마트 건물을 향해 던진다. 마트가 농산물 저가 판매로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그들의 과격한 시위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세계화 시대 대자본이 꿈쩍이라도 할 리 없다. 키메트의 장성한 아들은 마을 축제를 빙자해 만취한다. 무기력한 현실에 대한 그만의 저항이다.
솔레 가족의 위기는 전통의 해체를 은유한다. 농업이라는 인류의 오랜 직업은 산업화와 세계화 앞에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 복숭아 농장을 고집스레 지키려던 키메트는 힘겨움에 끝내 울음을 터트린다. 시대에 밀리고, 현실에 눌리는 삶은 보편적이다. 솔레 가족의 불행이 공감을 부르는 이유다.
출연자 대부분이 비전문 배우다. 각본 없이 즉흥 연기로 이뤄진 장면이 있기도 하다. 연기하지 않는 듯한 연기는 전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잘 어우러진다. 특히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표정이 마음을 흔든다. 카탈루냐어로 촬영한 점이 이색적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열린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최고상)을 수상했다. 카탈루냐어로 만들어진 영화로는 최초다. 내년 3월 열릴 제95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부문에 스페인 대표로 출품됐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등과 함께 경쟁할 유력 영화 중 하나다. 신예 카를라 시몬 감독의 2번째 장편영화다. 3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