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숨을 죽인다. 부들부들 손을 떨며 전화를 거는 사람은 하나. 덩달아 마음을 졸이며 그를 지켜보는 사람은 열하나. 몇 번 신호음이 울리고, 드디어 상대편이 전화를 받는다. "네, ○○반점입니다." 지켜보는 이들은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일본인 학생 미유코가 서툰 한국어로 드디어 입을 뗀다. "여보, 여보? 여보세요? 여기는…" 주문하는 곳의 위치를 이야기한 후 이윽고 메모를 보며 힘겨운 음식 주문이 시작된다. "짜장면 다섯? 다섯 개, 에또, 짬뽕 세, 세 개, 에또, 볶음? 볶음밥? 볶음밥! 네 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한국어로 전화 주문 성공이다. 전화를 끊자마자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2000년대 초반 내가 수업하던 한국어 교실의 풍경이다. 전화로 음식 주문하기 수업을 하면 실제로 교실에서 음식을 배달시키게 하고, 길 찾기가 주제일 때는 거리로 학생들을 내보내 행인에게 길을 묻게 만들고, 집 구하기 대화를 공부하면 부동산으로 학생들을 직접 보내 원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게 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수업들은 이제 멸종되고 없다. 사람들은 배달앱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지도앱으로 최단 경로를 안내받으며, 부동산앱으로 방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한국어 교사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다. 음식을 배달시킬 때, 길을 물을 때, 집을 알아볼 때 사용하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도 이상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도 어정쩡한 그런 상황이 된 것이다.
멸종되는 풍경은 또 있다. 음식점에서부터 각종 공공 기관까지, 직접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얻어가는 풍경이 그것이다. 그 풍경은 키오스크 앞에서 사람들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하는 모습으로 대체되고 있다. 앞으로 점원의 안내를 받아 음식을 주문하는 모습은 용인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키오스크의 습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근래 키오스크는 곳곳에 설치되고 있다. 고백하자면 나도 이제 겨우 키오스크에 적응해가는 상태다. 사실 키오스크 사용을 시도하다가 중간에 막혀 포기한 적도 몇 번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태이긴 하지만, 새로운 장소에서 다른 종류의 키오스크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당혹감은 여전하다.
이 당혹감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원인은 내가 내 돈을 내고 노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키오스크라는 기계가 준다는 것에 있었다. 이게 무슨 노동이냐며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 얼굴 볼 필요도 없고 얼마나 편한데? 하지만 키오스크를 사용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음식 주문하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키오스크로 음식을 주문하는 것은 단순하게 대면 의사소통의 과정을 화면으로 옮긴 것이 아니다.
고객은 음식 주문 대면 의사소통에서 이루어지는 행위 도식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행위 도식을 익혀야 한다. 먼저, 얼굴을 보고 음식을 주문하는 경우 고객은 식당 안에 들어서는 순간 손님의 지위를 점원으로부터 확인받고(어서 오세요!), 구체적인 안내를 받게 된다(뭐 주문하시겠어요?). 어떤 손님이 '카라멜마끼아또'라는 커피를 원한다고 생각해보자. 문제는 손님이 이 커피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다. 대면 의사소통에서 손님은 자신이 원하는 음식의 이름을 몰라도 점원의 안내를 받아 주문을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점원은 손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커피인데 거품 올라간 거 있잖아요? 카페 라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름은 복잡해서 모르겠고 달달한 거요. 아, 카라멜마까아또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러나 키오스크 앞에 선 손님에게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우선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마치기 전까지 그는 손님으로 인정되지도 않고 호명되지도 않는다. 왜냐? 키오스크 앞에서 그는 아직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키오스크 노동을 완수해야만 그는 비로소 고객이 된다. 그러나 카라멜마끼아또의 이름을 모르는 고객은 키오스크 노동을 수행할 수 없다. 이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커피의 종류를 구분하고, 각 커피의 특징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와 카라멜마끼아또의 차이를 알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주문을 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설정해 놓은 제품의 분류 방식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분류가 통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어떤 커피숍의 키오스크 첫 화면을 확인했을 때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키오스크의 대분류 중 내가 아는 것은 '커피'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분류는 잘 팔리는 여러 종류의 상품들을 묶어 놓은 '베스트'였다. 그 외의 다른 분류명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한참이나 그 분류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론해야 했다. 심지어 이런 분류는 이윤을 쫓는 기업의 방침에 따라 수시로 변경된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원하는 메뉴를 찾았다면 결제를 해야 하는데, 고객은 결제 방식의 종류(온갖 페이와 무슨 포인트 등등)와 절차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원하는 방식으로 결제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커피숍에서 판매하는 커피의 종류와 제품들의 분류 방식, 결제 방식을 모두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훌륭한 커피숍 직원이라고 여길 것이다. 이처럼 키오스크는 '자유로운 선택'을 제공하면서 고객에게 훌륭한 직원이 되라고 요구한다. 키오스크 앞에 선 고객은 직원이자 손님이 되어서, 기계의 마음(기업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함께 읽는 노동을 수행해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키오스크 노동은 대면 의사소통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키오스크 노동이 만만치 않은 난도의 노동인 이유가 여기 있다. 키오스크 노동은 새로운 담화의 구조는 물론 담화의 내용 스키마(Schema)에 대한 이해와 숙지를 요구한다. 이는 사실상 다른 언어로, 그것도 규격화된 방식으로만 소통할 것을 강제한다.
그런데 이 '규격화된 의사소통 방식'은 최대한의 이윤 창출이나 행정적인 편의를 목표로 설계된 것으로, 다양한 변수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제 의사소통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오스크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은 물론 우리의 몸까지 규격화시켜 키오스크라는 '기계'에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키오스크라는 기계와의 의사소통은 실패한다. 키오스크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를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설명하는 것은 이런 사실을 은폐한다. 키오스크가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그 편의란 비용을 절감하려는 자본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자본을 위해 이 만만치 않은 노동을 자발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키오스크에 대한 담론에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집단은 노인들이다. 이런 담론 속에서 노인들은 하루아침에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능력이 결여된 무능한 존재이자, 미숙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성장시켜야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된다. 이 때문에 배움의 즐거움이나 정부의 디지털 배움터 등 이들의 성장을 이끌어 줄 다양한 조력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조명된다.
이런 담론들은 두 가지를 전제로 한다. 첫째는 기술의 발전은 '선'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중립적인 기술은 없으며, 어떤 기술은 파괴적이고 퇴행적이다. 둘째, 모든 사회 영역에서 키오스크가 활용되는 것을 일종의 자연환경의 변화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키오스크의 전면적인 보급은 기후 위기로 인해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는 상황과 같은 차원의 것으로 인식된다. 키오스크에 대한 담론의 밑바닥에는 이런 메시지가 흐른다. 자연환경이 변하는데 뭐 방법이 있나요? 사람이 알아서 적응하는 수밖에요. 그러니 키오스크 못 쓰시는 분들, 공부해서라도 적응하세요. 이건 자연환경의 변화예요. 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됩니다. 정부도 도와드립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의 키오스크 사용 활성화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자본이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정부는 음식점 키오스크 사용자에게는 노동의 대가로 음식값을 할인해주는 정책이나 100% 무인화를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무분별한 키오스크의 도입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 이를 통해 키오스크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직접 주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키오스크를 둘러싼 노인들의 무능력은 '없던 일'이 된다. 다시 말해 키오스크와 관련된 노인들의 무능력은 무능력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정부는 키오스크의 습격을 불가피한 자연현상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사회를 '기계, 권력, 사회'의 저자 박승일은 '환경적 유형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사회' 즉 '관리사회'라고 설명한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둘러싼 환경을 관리함으로써 그 환경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포섭한다는 것이다.
최근 발생한 카카오톡 불통 사태는 우리가 자본이 구축하고 관리하는 환경에 포획되어 있으며, 자본이 관리하는 그 환경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삶이 순식간에 마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환경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자본이 허락한 자유일 뿐이다. 키오스크의 습격도 그런 환경을 만드는 과정의 일환이다. 키오스크가 지배하는 환경을 만드는 관리사회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키오스크를 위해 노동하라. 키오스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꾸라. 키오스크를 위해 복무하라.
이 말의 다른 버전은 이렇다. 자본을 위해 복무하라. 키오스크를 둘러싼 문제를 풀기 위한 시작은 우리가 이 명령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따르고 있었음을 깨닫는 것,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