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일부다. 이름을 붙였을 때 비로소 꽃이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폭염에 이름을 붙여 폭염을 분별하고 연구하기로 한 도시가 있다. 온대 기후권에 속하는 스페인에서도 가장 더운 안달루시아주(州)의 세비야(Sevilla).
세비야가 세계 최초로 이런 시도를 한 이유는 뭘까. 한국일보는 유럽 대륙이 폭염으로 신음한 8월 세비야를 찾아 그 답을 들어봤다.
지난 8월 16일(현지시간) 일기예보는 "비교적 온화한 날씨"라고 했다. 세비야에 도착한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온도계를 꺼내니 섭씨 38도(오후 4시 30분 기준)였다.
골목 곳곳에 자동 분무기가 설치돼 있었다. 분사되는 물은 그러나 열기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마다 걸려 있는 차양도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지 못했다. 너무 더워 카페로 피신했더니 주인은 말했다. "운이 좋네요. 안 더울 때 잘 왔어요."
이런 풍경은 세비야의 일상이다. 여름에 40도를 넘는 날이 흔하다. 올해는 특히 더웠다. 6월부터 40도를 넘겼고, 7, 8월엔 수시로 45도를 찍었다. 스페인 기상청 에멧(AEMET)은 올해 7월 세비야를 이렇게 표현했다. "31일 중 18일 동안 최고기온이 40도 이상이었다. '역사적 기록'이다."
스페인 정부는 1971년부터 2000년까지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폭염을 이렇게 정의했다. 평년보다 높은 기온이 최소 3일 이상 지속되는 상태. 세비야는 폭염을 자주 겪는다. 올해는 비가 거의 오지 않아 더 힘든 여름이었다.
폭염은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린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생명을 앗아간다. 스페인 카를로스 3세 연구소는 올해 7, 8월 폭염으로 인한 스페인 사망자가 3,833명이라고 추산했다. 유럽의 인간 사망 관련 모니터링 기관인 유로모모는 스페인에서 5,829명이 더위로 숨졌다고 잠정 집계했다. 기자가 취재 중일 때도 환경미화원이 길에서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세비야 시민들은 "더위에 익숙하기 때문에 더위를 견디는 방법도 잘 안다"고 자신했다. 침묵의 살인자를 시민들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만난 세비야 시민 20명에게 물었더니 18명이 "폭염이 온다고 특별히 대비하거나 주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관광객용 마차를 모는 로메르(49)는 "말에겐 물을 더 주지만, 내가 물을 더 마시진 않는다"고 했다. 오후 3시 펄펄 끓는 길에서 물건을 판매 중이던 이사벨(42)은 "특별히 뭘 해야 하죠?"라고 반문했다.
그래서 세비야시는 '특별히 위험한 폭염'엔 '특별 경고'가 필요하다고 봤다. 폭염에 이름 붙이기를 고안한 이유다. 시는 지난해 10월 이런 구상을 공개하며 "앞으로 폭염은 더 심각하게, 자주 나타날 것이다. 폭염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우리는 수천 명을 구할 것이다"라고 확언했다.
프로젝트엔 세비야시와 스페인 기상청, 대학, 연구소뿐 아니라 미국 싱크탱크 대서양위원회 기후복원센터 등 8개 기관이 참여했다. 명명 시스템 설계는 기후복원센터가 맡고, 정보 수집과 운영은 스페인 기관들이 담당했다. 프로젝트는 올해 처음 가동됐다. 이름을 붙인 첫 폭염 경보가 발령된 건 7월 25일이었다. 이름은 조이(Zoe). 이날 온도는 거의 45도였다.
이름 붙이는 원리는 태풍과 비슷하다. 미리 '조이', '야고', '세니아', '쉔세슬라오', '베가' 등의 순으로 정해두고 위험한 폭염이 올 때마다 이름을 붙여 경고를 발령한다. 다행히 올해는 '조이'만 사용하고 끝났다. 호세 마리아 마틴 올라라 세비야대 물리학 교수와 기후복원센터의 캐시 바우만 맥레오드·커트 식만 이사, 세비야시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명명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자세히 들어봤다.
세비야시는 조이가 발령됐을 때 주민센터를 폭염대피소로 사용했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폭염 취약층인 노인∙아이∙환자∙노숙인 등을 머물도록 했다"고 말했다. "갈증이 느껴질 때까지 기다렸다 물을 마시면 늦으니 미리 마시라", "설탕∙카페인∙알코올은 탈수를 유발하니 자제하라" 등 구체적 지침도 냈다.
파일럿으로 도입된 프로젝트는 지난달 1일 일단 종료됐다. 프로젝트 성과 측정 결과는 내년 중순쯤 나온다. 식만 이사는 "경보가 제때 발령됐는지와 같은 시스템 정확도, 폭염 이름을 인지한 주민군과 그렇지 않은 주민군의 행동 차이, 폭염 관련 사망∙질병 발생률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있다"고 했다. 그는 "몇 차례 더 실행한 뒤 결과물이 쌓이면 지속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기후복원센터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그리스 아테네 등 더운 도시에서 시범 시행해 볼 방침이다. 맥레오드 이사는 "틀만 갖춰지면 지역별 특성에 맞게 적용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노력 대비 효과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괜히 이름을 붙여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의견도 있다. 유엔 산하 세계기상기구(WMO)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세비야 주민 훌리야(53)는 "폭염이 심할 땐 이름을 붙이고, 안 그럴 땐 이름을 안 붙인다면, 이름이 없는 날엔 '안전한 날'이라고 착각할 수 있지 않나"라고 했다.
"그럼에도 필요하다"는 게 폭염 명명 시스템을 만든 팀의 주장이다. 다른 의도가 아닌, '생명 보호'가 궁극적 목적이라서다. 특히 폭염 취약 계층을 위험에서 구할 정책을 적시에 펼 수 있다. 맥레오드 이사는 "폭염으로 쓰러진 사람들은 다들 '제가 쓰러질 줄은 몰랐어요', '어느 순간 갑자기 쓰러졌어요'라고 말한다"며 "위험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손 놓고 있는 것보단, 작은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도 시도해보는 게 무조건 낫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 프로젝트를 '기상예보'가 아닌 '복지정책'으로 여겼다.
세비야와 비하면 한국의 여름은 비교적 온화하다. 그럼에도 한국이 고려해봄직하다는 게 프로젝트를 이끄는 이들의 말이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폭염이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WMO는 지난달 28일 "유럽과 북아프리카 등 많은 지역이 10월 하순이라는 점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례적인 더위를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스페인 일부 지역은 10월 말에도 30도를 기록했다. 지난해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인근 지역은 유럽의 최고기온인 48.8도에 달했다.
올라라 교수는 "기후위기는 늘 우리 예상 밖에 있다"고 경고했다. 꼭 폭염이 아니더라도, 기후와 건강 정보를 보다 유기적으로 결합해 국민 안전을 '적극적으로' 지킬 방법을 찾는 건 정부의 필수 과제라는 게 이들의 메시지다. WMO는 지난해 기후이상의 직접 영향권에 있던 유럽 인구가 51만 명이고, 경제적 피해가 500억 달러(약 71조500억 원)에 달한다고 2일 밝혔다. 폭염에 이름을 붙이는 건, 우리 목숨을 위한 노력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