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국내 국립공원 중 가장 넓은 면적에 걸쳐 있다.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하동·함양·산청 3개 도와 5개 시군을 아우른다. 글자 그대로 풀면 남달리 지혜로운 산, 지혜롭고 빼어난 산이다. 노고단, 반야봉, 삼도봉, 천왕봉을 중심으로 수많은 산줄기가 치맛자락처럼 펼쳐진다.
지리산 종주는 인생의 전환점에서 지금까지의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희망과 자신감을 찾고 싶을 때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인생 버킷리스트다. 화엄사~대원사(46.2km·화대종주), 화엄사~중산리(37.9km·화중종주), 성삼재~대원사(41.8km·성대종주), 성삼재~중산리(33.5km·성중종주) 코스 등이 있다. 지난 18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구례 화엄사를 둘러본 후 성삼재를 출발해 천왕봉을 거쳐 산청 대원사로 내려오는 ‘성대종주’ 코스에 도전했다.
시간을 최대한 아끼려면 심야버스로 구례로 내려가 바로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조금은 여유를 갖기로 했다. 충분히 휴식하며 체력을 축적한 뒤 종주에 나서는 방법을 택했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구례터미널에 내려 농어촌버스로 갈아타고 천년 고찰 화엄사로 향했다.
화엄사는 지리산권의 대표 사찰이다. 각황전, 대웅전, 4사자삼층석탑 등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가히 불교문화재 전시장이라 할 만하다. 느긋하게 사찰을 둘러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저녁 무렵 구례터미널로 되돌아와 지리산온천행 농어촌버스에 올랐다. 숙소로 잡은 ‘노고단게스트하우스 & 호텔’은 지리산 등산객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투숙객이 요청하면 전용 차량으로 성삼재까지 데려다 준다. 요금은 1인 2만 원이다. 객실 요금도 2만~5만5,000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무엇보다 저녁식사로 나오는 지리산흑돼지 바비큐가 일품이다.
숙소에서 전용 차량으로 30여 분만에 성삼재에 도착했다. 헤드랜턴과 등산스틱, 무릎보호대를 챙기고, 화장실까지 다녀 온 뒤 2박 3일 장도에 나섰다. 첫 목적지는 노고단(1,507m). 3.1㎞ 거리라 가깝고 경사가 적어 상대적으로 쉬운 길이다. 넉넉잡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노고단(老姑壇)은 늙은 시어머니를 위한 제단이라는 의미다. 날씨가 맑아 반야봉, 삼도봉, 천왕봉 조망에 아름다운 일출이 더해져 시작부터 좋은 기운을 선물 받은 것 같다.
노고단 고개에서 왔던 길을 뒤로 하고 종주 능선으로 진입한다. 돼지령과 임걸령을 지나 노루목삼거리에서 반야봉을 오를 수 있지만, 숙박 장소로 잡은 벽소령대피소까지 갈 길이 멀어 다음을 기약한다. (가까운 연하천대피소는 현재 공사 중이다.)
전북·전남·경남이 경계를 이룬 삼도봉에서 3개 도의 땅을 한 번씩 밟고 반야봉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화개재, 토끼봉, 연하천대피소, 삼각고지를 거쳐 마침내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했다. 잠자리를 배정받고 야외 테이블에서 저녁식사 후 피곤함을 달랜다.
이 구간은 짧아도 경사의 변화가 심해 안전에 유의하며 천천히 걸어야 한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약 2.6㎞ 떨어진 선비샘에 도착했다. 물을 마시려면 허리를 구부려야 하는 샘이다. 죽어서 존경 받는 선비의 무덤에 절하는 모양새가 연출된다. 물맛도 가을 산의 경치도 기가 막히다.
세석대피소에서 간식으로 체력을 충전한 후 촛대봉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잠시 화장봉에서 연하선경에 취하고 촛대봉을 거쳐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과거 산청 시천면과 함양 마천면 주민들이 물물교환으로 물건을 사고팔던 장소다.
요즘도 지리산을 종주하는 사람과 백무동, 중산리에서 올라오는 등산객이 만나는 곳이라 발걸음이 제법 많은 곳이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로 해가 지고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천왕봉 일출을 기대하며 잠을 청한다.
마지막 날 여정은 첫날만큼 길다. 천왕봉에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 새벽길을 나섰다. 성삼재를 출발할 때 ‘천왕봉 28.1㎞’ 푯말이 아득하게 느껴졌는데, 1.7㎞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니 정상에 가까웠음이 실감난다.
헤드랜턴과 등산스틱에 몸을 의지한 채 1시간 이동 끝에 천왕봉(1,915.4m)에 도착했다. 추위 속에서 동쪽 하늘을 응시한다. 여명이 밝아오며 신비스러운 붉은 기운이 올라오는가 싶더니, 둥근 해가 완벽한 모습으로 발아래 산 능선 위로 떠오른다. 순간 함께 오른 등산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터진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만난다는 해돋이와 지리산의 비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황홀하다. 천국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일 듯싶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천왕봉에서 거리가 짧은 중산리 방향으로 하산한다. 종주의 최종 목적지인 대원사주차장까지는 13.7㎞가 남았다. 내려갔다가 올라서기를 반복하며 차례로 중봉, 써리봉을 넘어 치밭목대피소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길을 재촉해 무제치기폭포를 지나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걸으니 대원사의 보물 다층석탑이 보인다. 잠시 경내를 돌아보고 대원사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시외버스로 산청 원지터미널로 이동해 서울남부터미널행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지리산 종주를 마무리한다.
▷종주 계획을 잡은 후 국립공원관리공단 예약통합시스템(reservation.knps.or.kr)에서 노고단 탐방, 벽소령대피소, 장터목대피소를 예약해야 한다. 도착 지점의 시외버스 시간표도 미리 확인하고 예매하는 것이 현명하다.
▷2박 3일 짧은 일정이라도 필요한 물품이 많다. 산행 중 경사가 심하고 돌길이 많으니 등산스틱과 무릎보호대는 필수다. 일교차를 감안해 가을과 겨울 옷이 필요하다. 조끼와 핫팩을 함께 챙기면 유용하다. 대피소에서는 즉석밥과 생수만 판매한다. 기본 먹거리 외에 체력 보충을 위한 간식도 준비해야 한다.
▷구례군에서 지리산 종주 인증제를 실시하고 있다. 종주하기 전 구례여행 홈페이지(gurye.go.kr/tour)의 ‘지리산종주인증제' 항목에서 '참여신청하기'와 '등록’ 절차를 거친 후 참가비(1만 원)를 입금하면 인증수첩을 개별 발송해 준다. 화대종주, 화중종주 2개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해 지정 장소(탐방안내소나 대피소)에서 수첩에 스탬프를 찍은 뒤 구례군청으로 발송하면 지리산종주인증서, 완주메달, 인증수첩을 받을 수 있다. 구례군청을 직접 방문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