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한 생애의 중요한 매듭으로 남곤 한다. 입학식과 졸업식의 짜장면이나 돼지갈비집 외식, 라면의 냄새, 동무들과 먹던 떡볶이가 그렇다. 햄버거와 치킨도 있다. 하물며 빵과 과자에서랴. 특히 해방과 6·25 전후에 태어난 우리 부모 세대에게는 찐빵과 '센베이'라고 부르는 일본식 전병, 오란다와 생강과자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서 빵과 과자 역사를 더듬어가다 보면, 전래의 음식이던 떡과 여러 과자류가 점차 서구의 물건들로 대체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빵을 일컬을 적당한 이름이 없어서 '양떡'이라고 불렀던 시대도 있었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많은 일본인이 조선에 들어와서 빵과 과자 장사를 했다. 상당수 '노포' 제과점이 해방 후 적산(敵産)불하로 가게의 역사를 열었다. 강점기 당시 일본인 경영의 제과점에서 기술을 배운 한국인의 창업도 활발했다. 여러 회고에 의하면, 서울과 부산 인천 대구 대전 등 대도시는 물론 여러 소도시에도 일본인 경영 제과점이 성업했다. 이들은 조선인 직원을 고용했는데, 중요한 기술은 전수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많다. 어쨌든 우리 추억에 남은 많은 빵과 과자는 이런 역사 안에서 달콤하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는 달지 않은 식사빵이 주류인 서구와 달리 이른바 '간식빵'이 주류가 되었다. 제과점의 번성과 함께 제빵산업도 눈부시게 성장했다. 일본에서 기계를 도입하고 더구나 미국 밀가루가 대량으로 들어오고, 미국 정부의 제빵 기술과 설비가 널리 보급되면서 1970년대 들어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개인 제과점에서나 사 먹을 수 있던 빵을 동네 작은 소매점들(구멍가게에서 출발해서 연쇄점, 나아가 슈퍼마켓이 되던)에서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큰 동네에는 제빵회사 대리점이 속속 들어섰고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구석구석의 동네 소매점에 빵을 배달하던 짐 자전거와 리어카를 나는 생생하게 떠올린다.
샤니며 삼립 같은 브랜드를 그때 우리는 알았다. 보름달, 크림빵, 파운드케이크, 소라빵, 단팥빵, 땅콩샌드위치 같은 온갖 빵은 꿈의 음식이었고, 개인사에 반드시 새겨지던 의미심장한 재료였다. 추운 겨울 하굣길에 먹던 호빵, 아끼고 아껴서 크림부터 핥아먹던 삼립크림빵을 누가 잊으랴. 심지어 화폐의 기준이 빵이 되기도 했다. 그 돈이면 크림빵 몇 개를 산다거나, 그때 크림빵이 10원 하던 시절이었을 거야, 같은 말을 우리는 일상으로 알았다. 지나고 보니, 황폐하던 노동의 시대였다. 일요일도 없이 기계를 돌리고 야근비도 변변하게 받지 못하고 그 빵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만든 빵이 다시 노동현장에 돌았다. 빵 하나 우유 하나는 최근까지도 '야식'의 표준 음식이었다. 새참이 사라진 농촌과 어촌의 음식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빵을 뜯어먹으며 살아왔던 셈이다.
아까운 청춘이 또 스러져버린 사건으로 우리는 크게 분노하고 아파한다. 놀라운 건 이 회사가 노조를 상대하지 않고 탄압해온 누적된 역사가 있었다는 점이다. 임종린 파리바게뜨 노조지회장이 회사에 항의하며 무려 53일간 단식을 하며 사경을 헤매는 동안에도 '그렇게' 빵은 만들어졌고, 우리는 무심하게 먹어 왔다. 통절한 아픔과 미안함과 분노가 치미는 시간이다. 게다가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온 크림빵과 보름달의 먹먹한 기억조차 훼손당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이 사건의 당사자와 피해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눈을 크게 뜨고 사건 이후를 봐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