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世宗大王)의 남자는 단연 '황희(黃喜) 정승'이다. 황희는 세종 시대에 90세(1363∼1452)까지 살면서 87세로 벼슬을 사양할 때까지 18년간 정승으로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황희는 세종의 자문 역할을 하였다.
세종과 황희의 첫 출발은 좋지 않았다. 황희는 태종(太宗)이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지명할 때 반기를 들었다. 신하 대부분은 태종 의중을 헤아려 찬성했지만, 황희는 장자(長子)를 세자로 삼는 원칙이 무너지면 후대에도 유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우려해 반대했다. 개국공신인 처남들과 세종의 장인마저 죽인 살벌한 태종에게 맞선 것이다. 결국 황희는 태종의 분노를 사서 서인(평민)으로 폐해지고 유배까지 갔다.
그러나 황희를 깊이 신임했던 상왕 태종이 그를 다시 관직에 임용할 것을 부탁했고, 세종은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세종으로서 황희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정의 신하들 역시 그의 등용을 반대했으니 숙청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의 행동이 "충성스럽지 않다고 볼 수 없다"며 반대 의견을 일축했다.
황희는 왕권이 강했던 시절 왕의 일방적인 독주에 제동을 거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종은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었던 황희를 늘 중용했다. ('참모로 산다는 것')
중국 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권력을 잡은 뒤 친형이자 정적이었던 이건성의 최측근 참모 위징(魏徵)을 과감하게 등용했다. 태종은 위징을 불러 "그대가 우리 형제를 이간시킨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질책하자 그는 "황태자가 만일 제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오늘의 재앙은 없었을 것"이라고 기세등등하게 답변했다. 그렇지만 태종은 그를 지금의 감사원장인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발탁했다.
그는 위징의 충고를 받아들여 건국 초기의 당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만약 위징이 없었더라면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부르는 태평성대는 없었을 것이다.
위징은 간언(諫言)하는 참모의 대명사로 꼽힌다. 그는 무려 300번 간언했다고 한다. 태종은 "나를 거스르면서 진실되게 간언했고, 내가 그릇된 일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며 무한 신뢰를 나타냈다. 위징이 병에 걸려 세상을 뜨자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 의관을 단정하게 하고, 역사를 거울 삼으면 천하의 흥망성쇠를 알고, 사람을 거울 삼으면 득실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위징이 세상을 떠났으니 거울 하나를 잃었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정관정요')
사실 최고 권력자에게 직언(直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위징조차 "성격이 유약한 사람은 속마음이 충직해도 말하지 못하고,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신임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말하지 못하며, 개인의 득실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므로 감히 말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최고 권력자의 '핵관'이라 불리는 '핵심 관계자'들은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 이들은 대통령을 만든 당사자들로 정치적인 무한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주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핵관들의 변명이자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또 대통령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은 핵관들의 무능력을 광고하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직언하고 설득하는 것은 핵관들의 의무이자 능력이다. 그런 진심과 자질이 없으면 호가호위(狐假虎威)에 머물고 만다.
이러한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 우선이다. 사주(四柱)에서 열 가지로 분류하는 기질 중 이는 '상관(傷官)'에 해당한다. 상관은 자신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기존 권위와 관행에 맞서고 개선하려는 것이다. 다만, 바른 말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시비와 반대와는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