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속 퇴진을 선언한 리즈 트러스 총리의 후임자를 놓고 영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집권할 자격 없는 정당'으로 낙인찍힐 위기에 처한 집권 보수당은 후임자를 초고속으로 선출하기로 했다.
트러스 총리에게 자리를 내주고 불명예 퇴진한 보리스 존슨(58) 전 총리가 석 달 만에 귀환할 가능성이 거론될 정도로 전망은 혼미하다. 영국 언론들은 인도계 엘리트인 리시 수낵(42) 전 재무부 장관이 유력하다고 점치고 있다.
분명한 건 영국의 정치·경제 위기의 골이 워낙 깊어 누가 새 총리가 되든 가시밭길이 예고돼 있다는 것이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에선 집권당 대표가 총리가 된다. 보수당 대표 경선을 주관하는 평의원 모임 '1922 위원회'는 20일(현지시간) 오후 트러스 총리의 사의 발표 직후 경선 규정과 일정을 발표했다. 위기의식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후보자 등록은 24일까지다. 입후보 요건은 '동료 의원 100명 이상의 추천'이다. 이전 경선의 요건(20명 이상의 추천)보다 까다롭다. 후보자가 난립하면 자중지란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1명만 후보로 등록하면 총리로 직행한다. 사실상 추대하겠다는 뜻이다. 후보가 2명 이면 28일까지 전체 당원 대상 온라인 투표로 승부를 가른다. 우편 투표를 하지 않기로 한 것도 속도전을 위해서다. 보수당 소속 의원은 357명이라 후보는 3명까지 나올 수 있다. 후보가 3명이면 의원들의 투표에서 후보를 2명으로 압축한 뒤 온라인 투표를 진행한다.
영국의 새 얼굴은 늦어도 28일까진 선출된다. 트러스 총리 사임 발표 후 8일 만이다. 존슨 전 총리 사임(7월 7일)부터 트러스 총리 선출(9월 5일)까지 걸린 시간은 약 두 달이었다.
현재로선 수낵 전 장관이 가장 주목받는 후보이다. 7월 경선 때 수낵 전 장관은 의원 137명의 지지를 확보해 트러스 총리(113명)보다 앞서다 막판에 밀렸다. 수낵 전 장관은 출마 명분이 확실하다. 그는 '감세를 통한 경제 성장'이라는 트러스 총리의 구호를 "동화 같은 이야기"라며 비판해왔다.
존슨 내각 출신인 수낵 전 장관은 코로나19 국면에서 재무부 수장을 맡아 대규모 재정지원 정책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존슨 전 총리가 퇴진을 거부하며 버틸 때 사표를 내 존슨 전 총리를 벼랑 너머로 밀어낸 게 그이다. 그가 총리가 되면 영국 최초 유색 인종 총리가 된다.
존슨 전 총리도 등판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카리브해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트러스 총리의 사의 표명 소식을 듣고 런던으로 복귀했다. 존슨 전 총리는 7월 총리 사퇴 연설에서 스페인어로 '다음에 보자'는 뜻인 '아스타 라 비스타, 베이비(Hasta la vista, baby)'라는 말을 남겨 복귀를 암시한 바 있다.
지난 경선에서 의원들로부터 105표를 받으며 선전한 페니 모돈트 보수당 원내대표도 유력 후보로 꼽힌다. 트러스 총리에게 사표를 내 트러스 시대의 마감을 앞당긴 엘라 브레이버만 전 내무부 장관도 거명된다. 케미 바데노크 국제통상부 장관, 벤 윌러스 국방부 장관도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트러스 총리의 감세안을 줄줄이 뒤엎어 '사실상 총리'라고 불린 제레미 헌트 재무부 장관은 불출마를 선언했다.
새 총리 앞엔 위기가 가득하다. 야당들은 "보수당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며 조기 총선을 요구하고 있다. 2016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보수당 출신 총리가 5번 바뀌는 등 보수당은 영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지 못했다.
최대 현안은 인플레이션을 비롯한 경제 문제다. 새 총리 취임 직후인 31일 재무부가 새로운 예산안을 내놓을 예정인데, 어떤 안을 내놓아도 여론의 호응을 얻기는 쉽지 않다. 예산안에 증세, 공공지출 축소 등 민감한 내용이 포함되면 보수당의 리더십이 또다시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