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진 150엔을 뚫고 3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다. 최근 24년 만에 나온 일본 정부의 시장 개입 등 환율 방어 총력전에도 엔화 가치가 일본의 버블(거품) 경제 붕괴 당시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미국의 글로벌 긴축 기조에 반한 '나 홀로 저금리' 정책의 결과인데, 중국 위안화마저 동반 추락하고 있어 '제2의 아시아 금융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20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장중 150엔을 넘어섰다. 엔·달러 환율이 150엔대로 올라선 건 일본의 버블 붕괴로 엔화 가치가 160엔 수준으로 추락했던 1990년 8월 이후 처음이다. 엔·달러 환율은 연초와 비교해 약 30%나 급등했다.
일본 금융당국이 달러당 150엔 붕괴를 막기 위해 긴급 채권 매입에 나섰지만 시장 불안을 잠재우지 못했다. 외신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10~20년물 국채 1,000억 엔, 5~10년물 국채 1,000억 엔의 매입 방침을 밝혔다. 스즈키 순이치 일본 재무상도 이날 "과도한 환율 변동성에 대응하겠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난달 말 '1달러=145엔'이 뚫리자 24년 만에 '엔화 매입·달러 매도'를 통한 시장 개입으로 방어전을 펼친 일본 정부의 노력은 효과가 한 달도 채 가지 않았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이 거래되는 기축통화인 엔화의 추락은 미국 주도의 글로벌 금리 인상에 따른 강(强)달러 현상으로 심화했다. 고물가와 싸우는 미국이 금리를 3~3.25%까지 끌어올리는 동안, 일본은 초저금리와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고수하며 '마이웨이' 중이다. 환율 방어를 위해 금리를 끌어올려야 하지만, 오랜 침체로 약해진 경제 체력과 우리 돈 1경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국가부채가 일본의 발목을 잡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도 최근 엔·달러 환율 급등에 "급격하고 일방적이라 경제에 마이너스"라고 진단하면서도 "안정적인 엔저 움직임은 경제 전체에 플러스"라며 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놨다.
문제는 글로벌 통화인 엔화의 추락에 속도가 붙을수록 우리나라를 포함한 글로벌 금융시장의 위험을 키운다는 점이다. 엔화 가치 방어를 위한 일본 정부의 개입 가능성이 시장에 반복적으로 영향을 줄 경우 글로벌 금융시장 전체의 변동성도 확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의 위안화까지 경기 둔화 우려에 좀처럼 맥을 못 추면서 두 통화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는 원화 가치도 덩달아 출렁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위안화 가치는 지난달 '포치(달러당 7위안)'가 무너진 뒤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전날 중국 역내 위안·달러 환율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역외 위안·달러 환율도 7.279위안까지 오르며 위안화 역외 거래가 시작된 2010년 이후 역대 최고치를 새로 쓴 상황이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7.1원 오른 1,433.3원에 마감했다.
엔화와 위안화의 동반 추락이 아시아 외환시장 전체로 번져 '달러화 대비 통화약세' 현상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짐 오닐은 최근 엔·환율이 150엔을 넘길 경우 "아시아의 자금 유출 방아쇠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티븐 이네스 SPI에셋매니지먼트 파트너도 "아시아 외환시장에서 위안화 약세는 늘 우려스러운 전조"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