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채권시장 안정펀드(채안펀드) 재가동 카드를 꺼내 들었다. 레고랜드발(發) 채권시장 불안을 조기에 진화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인데, 싸늘해진 투심을 되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금융투자업계는 별도로 한국은행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20일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시장안정을 위한 특별 지시사항’을 통해 “채안펀드 여유재원 1조6,000억 원을 통해 신속히 단기채권 매입을 재개하고, 추가 캐피탈콜(펀드 자금 요청) 실시도 즉각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최근 단기자금시장의 변동성 확대에 경각심을 갖고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 “특히 강원도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증권(ABCP) 관련 이슈 이후 확산되는 시장 불안요인에 대해 면밀히 모니터링 중”이라고 강조했다.
당국은 이날 별도로 주요 은행 재무 담당 임원과 점검회의를 열고, 현재 진행 중이던 은행권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정상화 조치를 6개월 유예하기로 했다. LCR은 향후 30일간 예상되는 순 현금 유출액 대비 고유동성 자산 비율이다. 100%를 기준으로 비율이 낮을수록 유동성이 부족한 상태를 뜻한다. 코로나19 확산 기간 85%로 낮췄다가 내년 7월 100% 정상화를 추진 중이었지만, 이번 조치로 일정이 반년 더 미뤄졌다. 은행들이 고유동성 자산 매입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은행채 발행을 늘려 채권금리가 더 높아진다는 지적을 염두에 둔 조치다. 이 밖에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증권사와 여신전문금융사에 대해선 한국증권금융을 통해 유동성을 지원할 방침이다.
당국이 빠르게 움직인 건 ‘레고랜드 사태’의 파장이 심상치 않다는 판단에서다. 앞서 강원도는 춘천에 위치한 레고랜드 테마파크 조성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2,050억 원 규모 PF ABCP를 발행하고 투자자를 모았다. 강원중도개발공사(GJC)의 상환보증 덕에 2020년 11월 발행 당시 이 어음은 최고 등급(A1)의 신용 등급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달 강원도가 GJC 회생신청에 나서며 상환보증이 사라졌고, 어음의 신용 등급은 순식간에 C(채무불이행 위험 매우 높음), D(상환 불능)로 추락하며 이달 4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믿었던 지자체의 배신에 시장은 빠르게 얼어붙었다. 유동화증권 금리가 8~10%대까지 치솟은 데 이어 회사채와 기업어음(CP) 금리까지 연쇄적으로 치솟으면서 채권시장 전반이 마비될 위기다. 불신이 커진 탓에 금리를 높여도 마땅한 투자자를 찾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강원도가 뒤늦게 지급보증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증권사와 건설사의 부도설 등 근거 없는 루머까지 확산하자 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는 ‘합동 단속반’을 가동, 강력 대응을 시사했다.
증권가에선 채안펀드 가동을 통한 유동성 공급을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지만, 근본적 해결책이 되기엔 부족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시장 기능의 완전한 회복엔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특히 기존 시장 참여 기관의 캐피탈콜 방식 채안펀드 자금 조성은 자금이 이쪽 주머니에서 저쪽 주머니로 옮겨졌을 뿐 신규 자금 공급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 때처럼 한은의 무제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과 비은행 금융기관 대출, 증권금융 유동성 공급 등 추가 대책이 병행돼야 한다는 요구다. 실제 나재철 금융투자협회 회장이 최근 이창용 한은 총재를 만나 한은이 증권사 등에 회사채를 담보로 자금을 대출해주는 '금융안정특별대출'을 재도입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