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브란덴부르크 작은 마을 템플린의 조그마한 공동묘지에 소박하고 평범한 묘가 있다. 바로 최장수 최연소 독일 총리를 지낸 후 은퇴한 메르켈의 어머니 헤르린드 카스너(Herlind Kasner·1928~2019)와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Horst Kasner·1926~2011)의 묘이다. 부부의 묘에는 이름과 생년월일, 사망의 날짜가 적힌 조그마한 비석 이외에는 장식물이 없다. 부부의 생전 삶도 그들의 묘처럼 검소했다. 딸이 국가원수가 되었어도 비좁은 생활 공간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가 템플린을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는 기독교 목사로서 교구와 주위 사람을 위해 헌신했고, 어머니는 봉사활동을 그치지 않고 통일 후에는 시의회에서 활동했다"고 전했다.
혹자는 메르켈이 구소련에 소리 나지 않게 조력했다는 이유로 그의 선친을 KGB의 비공식 회원으로 의심하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스너 목사는 자신이 책임지고 운영해야 했던 큰 교구의 수많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굴종의 길을 선택했을 수 있다. 부부는 수백 명의 정신적·신체적 장애인을 보호하고 치유하고 양육하는 일에 헌신했다. 동시에 자식 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딸이 총리가 되었어도 칭찬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책임 있고 깨끗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며 섬김을 강조했다고 알려졌다.
헤르린드 여사의 삶도 마찬가지다. 가족과 교회를 섬기는 그녀는 여느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지만 개성 있고 지적이며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식에게 헌신적이었지만, 딸과는 정치적 이상을 달리했다. 딸은 보수당인 기민당의 당수이자 총리였지만, 그는 중도 진보당인 사민당의 당원이었다. 메르켈은 통독 직전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여 동독에서 새로 형성된 기독교민주당에 합류하였고, 후에 헬무트 콜 총리에게 발탁되어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메르켈은 어머니의 표를 한 번도 얻지 못했다. 보통의 어머니들은 딸이 총리가 되면 딸을 돕기 위해서라도 딸의 당에 입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르린드 여사는 오히려 시의원으로서 사민당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말이 없었고 항시 겸손했다. 통일 이후 90세가 되어 휠체어를 타고도 평생 성인교육기관인 '국민대학(Volkhochschule)'에서 열성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어머니는 딸이 독일 총리임을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없고, 한 국가를 이끌어가는 딸에게 겸손과 정성을 가르쳤다고 한다. 가능하면 딸과 정치 이야기는 피했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컸고 메르켈 또한 효성이 극진한 맏딸로 소문이 나 있었다. 노모가 병으로 누워 계실 때 메르켈 총리는 집에 와 어머니가 좋아하는 죽을 정성껏 끓여 먹여 드릴 정도로 효심이 컸다. 딸과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어머니였지만 모녀 사이는 친구처럼 정이 돈독했다.
약한 자를 위해 베푸는 삶의 표상인 메르켈의 부모에게서 한국의 전통사상 '홍익인간'의 삶을 느낄 수 있다. 현명한 부모로부터 정직하고 올바른 정신 교육을 받은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은 뒤에도 비리를 일삼거나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훌륭한 사람 뒤에는 위대한 부모의 애정과 교육이 바탕에 있다. 미국의 링컨과 오바마의 어머니는 선한 삶의 궤도를 그려왔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메르켈의 부모 이야기는 우리에게 별로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정쟁을 정책으로 승화시켜 갔다는 평가를 듣는 메르켈과 함께 그 부모의 성품과 널리 이롭게 베푸는 삶의 궤적은 우리 정치인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