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가 할리우드를 주시한 까닭

입력
2022.10.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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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할리우드의 매카시 광풍

사회주의 이론에서 정치는 국가권력을 포함한 모든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활동 전반을 아우르는 용어다. 당연히 선전 선동도 포함된다. 당과 엘리트 집단의 선전 선동을 지나치게 중시해 프롤레타리아의 자율성과 자발적 투쟁 의지를 경시하는 경향을 ‘선전주의’라 해서 반혁명적 종파주의로 경계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선전 선동은 마르크시즘 전통에서 조직론 못지않게 중시된다.

레닌이 특히 그러했다. 그는 계급 이해에 기반한 투쟁의 경험이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원전’의 통찰을 수용하면서도, 노동계급이 자동적으로 사회주의에 이끌리지 않는다는 현실도 인정했다. 그는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선전 선동의 가치와 가능성을 중시하는 게 당의 역할이라고 역설했다. 1920~30년대의 소비에트가 국가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한 게 영화였다. 레닌은 1919년 영화산업을 국유화하고 소련국가영화위원회를 설립하며 “영화는 대중 선동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평했다.

그해 10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현 러시아 국립영화대학)를 설립, 다양한 직종의 영화인들을 양산해 정치 선동영화와 뉴스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하도록 했다. 에이젠슈타인의 ‘파업’과 ‘전함 포템킨’,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가진 사나이’ 등이 그 시대에 만들어졌다. 소비에트 영화는 1930년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득세와 스탈린 시대를 맞이하며 점차 획일화했다.

냉전기 미국이 할리우드를 주시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당시는 공산당이 탄압 속에서도 대선 후보까지 내던 때였고, 당원 일부가 영화산업에 종사한 것도 사실이었다. 매카시즘의 미 하원 ‘비미활동위원회(HUAC)’는 1947년 10월 20일, 할리우드에 대한 전면 조사에 착수했다. 배우와 감독 등 325명에 달하는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수정헌법 1조를 들어 조사 자체에 불응한 이른바 ‘할리우드 10’ 중 금세 조사에 응한 에드워드 드미트리(감독)를 제외한 9명은 ‘의회 모욕죄’로 징역 1년 실형을 살았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