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장소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나에게 온갖 지식을 실시간으로 무제한으로 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은 이상향이었다. 1995년부터 썼으니 여태 살아온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은 인터넷과 같이했고, 이제는 이상향이 아닌 제2의 고향인 셈이다. 태어날 때부터 온라인에 접속한 '디지털 네이티브'는 아닐지라도 20대부터 '디지털 이민자'로서 거의 동화됐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쉰 살을 맞은 이민자라서 느끼는 향수 같은 것일까. 문득문득 원래의 고향 생각도 난다.
내가 가치를 두는 사물과 장소를 꼽자면 책과 도서관, 서점이다. 외국에 여행을 가도 도서관이나 서점, 헌책방이 눈에 띄면 꼭 들러서 책을 산다. 책과 서가에서 풍기는 향기는 실제로도 비유로도 디지털로 맡기 어렵다. 손가락 끝으로 언제든 온 세상의 디지털 도서관과 온라인 서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워낙 큰 데다가, 코로나까지 겹쳐 지난 2년 남짓 서점과 도서관에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데이터를 판독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로만 머물기에는 인간의 몸으로 느끼는 책과 그것이 모인 공간의 감각이 그립다.
마침 올 가을부터 다시 도서관과 서점을 찾아가게 됐다. 책이야 사시사철 읽으면 되니 꼭 독서의 계절이라서는 아니겠지만, 서늘한 가을밤은 등불을 가까이해 글 읽기 좋다는 사자성어 등화가친(燈火可親)에서 유래했든, 가을철에 놀러 나가는 사람이 많아 오히려 책이 덜 팔리는 바람에 서점들이 지어낸 구호든 상관없이, 가을걷이철에 차분하게 한 해를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하기에 독서가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책은 빈틈없는 완성품이 아니다. 글자를 곧이곧대로 읽어 들이기만 하는 게 아니고 글의 틈새와 행간으로 독자가 생각을 맞춰 보고 채워 나가며 완성하는 물건이다.
'읽다'를 뜻하는 라틴어 lego는 원뜻이 '집어들다, 모으다, 뽑다'이다. 지식을 집어들고 모은다는 데서 읽는 행위를 빗댔겠는데, 책을 읽으려면 도서관이나 서점의 서가에서 책을 골라서 집어들고 여러 권을 모아서 사오기도 한다. 영어 intellect(지성), intelligent(총명)의 어원인 라틴어 intellego(이해하다)는 inter(사이)와 lego(읽다)가 합쳐진 말이다.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이해를 한다는 뜻이겠으나, 서가들 사이에서 책들 사이에서 읽는 모습도 연상된다.
디지털 읽기도 중요한 시대가 됐지만 우리가 책을 집어들고 모으는 행위는 몸소 느껴야 제맛이다. '읽다'의 뜻인 현대 그리스어 diavázo는 '건너게 하다, 옮기다'의 뜻인 고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글자를 쭉 따라 행간을 건너가면서, 우리는 또 다른 단계로도 건너가고 또 다른 세상으로도 들어간다. 선선한 가을은 산과 들로 놀러 나가기에만 좋은 철이 아니다. 뚜렷한 목적이 없더라도 도서관과 서점에 찾아가 우연히 책을 만나는 여행도 묘미가 있다.
이제 디지털은 우리 삶의 커다란 일부가 됐다. 과거로 귀향할 수는 없어도 여행은 할 수 있다. 도서관과 서점까지 걸어가 서가 사이를 거닐다가 멈춰 서서 책을 들추기에 가을이 딱 좋은 계절 아닐까. 라틴어 lego와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마치 레고 조각을 맞추듯 즐겁게 독서에 다가갈 수도 있다. 아주 가끔 레고 조각을 밟아서 비명도 지르듯 그런 아픔도 견뎌야 진정한 독서겠지만 지레 겁먹을 만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