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밴쿠버로 엄마와 단둘이 이민을 떠난 초등학생 동현은 학교에서 점심으로 싸온 김밥 때문에 놀림을 받는다. “방귀 냄새가 나, 역겨워.” 아시아계 학생이 낯선 건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엄마 소영에게 동현의 이름을 바꾸자면서 ‘데이비드’를 추천한다. 지난 5일 개막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인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 앤서니 심의 ‘라이스보이 슬립스’에 나오는 장면으로 감독의 실제 경험을 재구성한 것이다. 한국인 이민 가족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9일 폐막한 밴쿠버국제영화제 등에서 잇따라 수상하며 제2의 ‘미나리’로 각광받고 있다.
11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만난 심 감독은 “요즘 캐나다에 이민 오는 한국 사람들에겐 이름을 바꾸지 말고 한국 이름 그대로 쓰라고 권한다”며 “이젠 캐나다인들이 한국 이름 발음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백인 주류 사회에서 굳이 한국계라는 정체성을 지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한인 이민 가족의 미국 정착기를 그린 ‘미나리’의 미국 아카데미상 수상에 이어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잇단 수상은 북미 지역 이민 1.5세나 2, 3세 영화 창작자들의 정체성을 다룬 K스토리가 전 세계 영화계에 새로운 자극을 주고 있음을 시사한다.
할리우드에 K스토리 열풍을 일으킨 건 한국에서 제작돼 태평양을 건너간 작품들이었지만 이제 한인 창작자들이 가세해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20~30년 전부터 문학계와 영화계를 중심으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 오던 한인 스토리텔러들이 K컬처의 전 세계적 인기와 함께 비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배우들이 참여한 드라마 ‘파친코’와 영화 ‘미나리’가 대표적이다.
올 초 애플TV플러스를 통해 공개된 8부작 시리즈 ‘파친코’는 한국계 작가의 원작을 토대로 한국계 제작진이 주축이 돼 한국 배우들과 한국어로 제작한 첫 미국산 K드라마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프로듀서 테레사 강 로, 제작 총지휘를 맡은 쇼러너이자 각색 작가인 수 휴, 두 감독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이 모두 한국계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중이 상당한 데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시청자들에게 낯선 한국 역사를 다룬 이 드라마에 애플은 왜 투자를 결정했을까. ‘파친코’ 제작이 결정된 시기는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같은 한국 작품이 미국에 소개되기 한참 전이고, K팝의 미국 공략이 본격화하기 직전이다.
이메일로 만난 수 휴 프로듀서는 “’파친코’ 성공의 수훈갑은 애플의 크리에이티브 팀”이라며 “너무 위험한 시도였지만 그들은 작품 속 캐릭터들이 아시아인이건 아니건 감정적으로 공감했고,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의 가족사를 발견했다. 휴머니티는 모든 걸 초월한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이 경계를 허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에 앞서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등 한국 감독들은 선구적인 영화 제작이 미국과 유럽 감독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며 “지난 20년간 이 같은 노력들이 쌓여 왔기 때문에 ‘파친코’가 제작될 수 있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파친코’ 같은 도전적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데는 한국계 감독과 작가뿐 아니라 제작자들이 늘어난 영향도 있다. 한국 작가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2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나 다를 바 없다. 수 휴 프로듀서는 "(처음 할리우드에서 일할 때만 해도) 드라마 작가들 중 아시아계는 물론, 유색인종은 나 혼자뿐이어서 의지할 만한 한인 동료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오래전엔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한국계 미국인이 매우 적어서 한국계를 만나면 오히려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당시 시스템에선 나 같은 유색인종에게 주어진 자리는 제한적이어서 서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요. 이젠 많은 게 바뀌었어요. 할리우드 임원들도 더욱 다양한 사람을 고용해야 드라마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한국계 커뮤니티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됐어요. 한국계 미국인 동료가 성공하면 우리 모두가 성공하는 겁니다. 점점 더 많은 한인 창작자들과 제작자들이 나오고 있어요. 다음 세대의 활약이 몹시 기대됩니다.”
한국어 대사가 대부분인 ‘미나리’가 미국에서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제작사인 플랜 B 엔터테인먼트의 한인 프로듀서 크리스티나 오의 역할이 크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요즘 관객들은 진실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며 "개발 단계에선 한국어 대사가 너무 많지 않나 걱정하기도 했지만 가장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때 관객들도 공감할 것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한국계 주연배우를 기용하고 한국어 대사를 밀어붙이는 한인 제작자들의 자신감은 2010년대 초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ABC 드라마 '로스트'에서 김윤진과 출연해 국내에도 친숙한 배우 겸 제작자 대니얼 대 김은 2014년 한국 드라마 '굿닥터' 리메이크 판권을 사들인 뒤 "아시아계 주연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다"고 했다. 몇몇 방송사에서 거절당하며 답보 상태에 머물던 '굿닥터' 리메이크 프로젝트는 영국 배우 프레디 하이모어가 캐스팅되면서 ABC에 안착할 수 있었다.
굴곡진 역사에서 기인한 한국만의 독특한 디아스포라와 미국 내 소수자로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미국산 K스토리에서 자주 발견되는 주제다. 최근 국내 출간된 한국계 미국 작가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를 배경으로 격동의 세월을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소설이란 점에서 이민진의 ‘파친코’와 닮았다. 배우이기도 한 저스틴 전 감독은 지난해 한국계 입양인들의 충격적 현실을 담은 ‘푸른 호수’로 칸영화제에 공식 초청됐다. 스테프 차가 쓴 소설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는 미국 한인 사회의 정체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을 소재로 한다. 사회학자 그레이스 조의 ‘테이스트 라이크 워’는 미군 상대 성노동자였다 미국으로 이주한 어머니의 기구한 삶에 대해 쓴 자전적 에세이다. 이민 1세대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다면, 그 자손들은 거꾸로 자신들의 굴곡진 뿌리를 찾아 나선 셈이다.
할리우드는 이제 소수자로서 차별과 억압을 받으며 성장해온 한인 2,3세대의 개인적 체험과 내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인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에서 시인 캐시 박 홍은 이렇게 썼다. “아시아인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 우리는 진정한 소수자로 간주될 만한 존재감조차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계 미국인 싱어송라이터 미셀 자우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한국인 어머니에 대해 쓴 베스트셀러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도 영화화될 예정이다. 자우너는 “어릴 땐 한국인이라기엔 너무 백인 같고 백인이라기엔 너무 한국인 같아서 늘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이었다”면서 “아웃사이더로서의 경험이 곡을 쓰고 글을 쓰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됐다”고 고백했다.
이처럼 아웃사이더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한인 작가들의 이야기는 민족성을 초월한 보편성과 맞닿아 있다. 억압과 차별을 딛고 뿌리를 찾는 이야기는 세계 어디서나 공감할 수 있는, 서사의 고전적 주제다. 김주혜 작가는 ‘작은 땅의 야수들’ 서문에서 “가장 나다운 글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었다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오래된 말에 방점을 찍었다. 이민진 작가도 “더 개별적이고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쓸수록 결국엔 더 보편적인 이야기가 됐다”고 말했다.
미국의 K스토리 르네상스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성공은 미국 내 한인들의 정체성까지 바꿔놓고 있다.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거주하며 ‘H마트에서 울다’ 등을 우리말로 옮긴 정혜윤 번역가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10대 딸이 K팝을 좋아하는 백인 친구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갖게 됐고, 전에는 잘 쓰지 않으려 하던 한국어를 적극적으로 배우려 애쓴다”고 말했다. 한인 스토리텔러들이 소수자로서 겪어온 차별과 배제, 억압과 역경에 대해 전보다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와 미국인들의 관심으로 인해 한국계 작가들의 자긍심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정씨는 부연했다.
다만 미국 내 K스토리 열풍이 'K'의 다양성을 위축하고 고착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대중이 관심을 끄는 전형성을 내세운 작품만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씨는 "한국 특유의 끈끈한 가족애와 한국 음식, 동양적 외모를 지닌 주인공, 한국어 대사 같은 요소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느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쓴 소설이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한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개인주의가 강하고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며 평범한 미국음식을 즐겨 먹는 아시아계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는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정씨는 "현재의 관심에 그치지 않고 한국계 미국인이 만든 새롭고 다양한 이야기들, 아시아인의 전형성을 벗어난 한국계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일이 많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