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요? 모성이란 신화에 가려진 이름

입력
2022.10.15 04:30
12면
<90> 숭배하거나 멸시하거나...'모성 신화'에 가려진 여성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 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어머니,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강의에서 게임 얘기는 늘 잘 먹히는 소재다. 개중에도 리그오브레전드(League of Legends, LOL)는 워낙 유명해서 다양한 사례로 활용되는데, 경쟁과 전투라는 게임 목적을 확인하고자 청소년에게 “이게 뭐 하는 게임이죠?”하고 물으면, 애초 의도와 달리 “부모님 안부 묻는 게임이요”라는 대답이 곧잘 나온다. 해당 게임 유저들이 패드립(패륜과 드립의 합성어로, 부모를 비롯한 가족을 조롱하거나 농담거리 삼는 모욕을 뜻한다)으로 서로의 부모를 욕하는 것에서 착안한 이야기다. 혀를 차고 싶겠지만, 사실 인간이 서로를 욕하고 탓하는 것이야 원체 늘 있었던 일 아닌가. 오늘은 그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욕에 부모, 개중에서도 ‘엄마’가 자주 등장하는 현상을 생각해보려 한다.

욕의 목적과 의도를 생각했을 때, 많은 욕이 직간접적으로 엄마를 언급한다는 건 그만큼 곧 많은 사람들에게 엄마가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엄마를 소재로 한 작품도 참 많다. 시나 소설은 물론이고 특히 영화, 드라마에서 엄마는 '치트키' 같은 존재다. 등장만 하면 눈물 훔칠 손수건은 필수다. 아낌없이 주는 엄마, 집에서는 늘 양보하면서도 밖에서는 강인한 엄마, 지겨운 잔소리마저 그리운 엄마. 굳이 대단한 효심이 아니어도 자신을 품고 돌본 존재를 향한 사랑과 감사는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머리카락, 손, 발톱까지 내 신체의 모든 게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니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고 배우지 않았나. 이렇게 유교사상과 문화에 우리의 본능이 더해 어머니는 늘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존재였다.

멸시와 숭배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친구들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세간의 믿음과 기대가 마냥 곱게 들리지 않게 된 계기는 바로 함께 놀고 마시던 친구들이 점차 엄마가 되어가면서부터였다. 분명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철없이 놀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제는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자신을 빼닮은 아기 사진을 걸고 예뻐 죽겠다는 듯 보고 있다. 그 변화가 신기하고 놀랍지만 한편으로 곁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고민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을 듣게 됐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고 출퇴근길에서, 직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눈치를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 출산 과정에서 무통주사며 제왕절개며 떠도는 말들에 아이를 품은 이보다 말을 얹는 이들에게 선택지가 놓이는 경우를 보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난 이후,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는 게 신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는 게 씁쓸하다는 친구도 있었다.

허나 이런 말들은 세상에 들리지 않았고 그저 우리끼리만 맴돌다 사라졌다. 왜냐면, 엄마니까.

가사와 육아에 치여 수면부족으로 눈이 퀭해지면서도 육아’휴(休:쉴 휴)’직을 쓰기 위해 눈치를 봐야 했다. 대개의 많은 회사는 자녀가 있다고 사정을 봐주는 일이 없었지만 자녀가 아플 때면 전화를 받는 쪽은 늘 엄마였다. 그럼에도 가정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먹고 싶은 음식이 있거나 귀찮은 빨랫거리가 있을 때는 엄마를 찾는 게 팁처럼 공유되곤 했다. 아침으로 라면을 끓여주는 아빠는 위트 있고 가정적이라 불리지만, 아침으로 라면을 끓여주는 엄마는 게으르고 모진 엄마가 되는 세상이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은 엄마를 ‘맘충’이라는 사람이 아닌 존재로 부르지 않던가. 친구들의 복잡한 경험과 사정은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너무나 쉽게 사라지고, 모든 고난과 역경은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당연히 감내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엄마를 멸시하고 또 숭배하는 사회에서 복잡다단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란 너무 고단해 안 그래도 힘든 엄마 되기에서 미끄러지는 이들이 많았다.

모성이라는 신화가 만드는 그림자

각종 육아예능은 이런 흐름에 부채질을 했다. 귀여운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우곤 했지만, 그 뒤에는 럭셔리한 육아용품과 아름다운 모습만이 있을 뿐, 밀린 살림, 육아의 흔적과 독박육아의 괴로움에 고통받는 모습은 드물었고 간혹 있어도 전문가의 손길을 거쳐 해소될 일시적 문제일 뿐이었다. 자연분만이, 모유가 좋다는 속없는 얘기들은 돌고 돌아 발달이 더딘, 기침이 잦은 아이의 엄마들에게 죄책감을 안겼다. 예능에서 자격미달의 엄마를 강조할수록, 귀감이 되는 훈육법으로 문제를 고친 어린이가 등장할수록, 애꿎은 친구들의 얼굴에 긴 그늘이 졌다.

무성 생식이 가능한 인간은 없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도 있었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더 많은 가사와 돌봄 역할이 강요되는 사회에서 돌팔매질은 유난히 자주 여성을 향했다. 그뿐일까.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할 줄 모르고, ‘가임기 여성 지도’로 수많은 이들을 경악케 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 와중에 규모도, 예산도 미약했던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라는 정체 모를 부서로 격하시키는 시도가 진행 중이다. 부끄러운 과거를 개선하고자 하는 철학과 정책, 의지가 없는 사회에서 모성에 대한 예찬(어머니는 위대해!)은 너무 쉽게 다른 엄마를 향한 당위의 말(그 위대한 엄마가 이것도 못/안 해?)이 되었기에, 이 세상에서 모성애는 값싸고 손쉽게 육아와 돌봄을 위탁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천진무구하게 모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엔 현실의 엄마들은 외롭고 고단했다.

엄마에게 이름을 돌려주자

숭배와 멸시 사이에서 줄타기하지 않고 엄마를 사랑할 수는 없을까?

엄마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 행사에서 엄마페미니즘, ‘부너미’ 활동을 하고 있는 동료강사 이성경 선생님을 만났다. 청소년을 위한 행사라 선생님의 자녀와 함께했는데, 열심히 회의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는 자녀의 눈에 사랑과 존경이 가득했다. 문득 궁금했다. 그렇다면 내가 존경하고 애정해 마지않는 우리 엄마는 대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직장인으로서 우리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엄마의 친구들에게 엄마는 어떤 모습일까? 학창시절, 엄마는 어떤 꿈을 꿨을까? 지금의 엄마는 어떤 희로애락을 가지고 살아갈까? 막상 엄마는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르는 게 참 많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 출근하는 엄마를 보고 울고불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남아 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런 기억을 소환하며 나의 결핍을 정당화하곤 했는데, 다 큰 금쪽이가 된 이제, 애먼 엄마에게 죄책감 불러일으키기를 멈추고 세상에 나를 초대한 또 다른 인간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그는 돌봄에 능하고 사람을 애정 어리게 대하지만 요리하는 것에 큰 관심이 있지 않고 대신 많은 소설을 탐독하며 스스로의 직업적 성취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다. 때로 정치적인 의견 차가 발생해서 툭탁일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꽤나 본받을 만한 어른의 태도라 느껴지기도 한다. 엄마를 대하는 이런 시도가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지만 한편으로 기대된다. 사회가 덧씌운 엄마라는 이름의 기대와 역할, 부담을 내려놓고 꿈과 욕망, 역사가 있는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정현종 시인의 말마따나 사람이 온다는 건 그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니까.

너무 위대하지도, 아주 당연하지도 않은 주변 모든 보통의 엄마들이 제 이름을 찾을 수 있도록, 또 묻는다.

“당신의 엄마는 어떤 사람인가요?”

이한 작가